요즘 KBS-TV의 사극 「태조 왕건」이 인기 몰이를 하면서 정치권에서 조차 「아지태 공방론」이 이는 등 등장인물에 대한 비유가 흥미를 끈다.
 그런데 삼국의 한 복판에 자리잡은 청주일대가 접경지대라서 그런지 역사의 무대에서 자못 큰 비중을 차지한다. 비단 아지태가 청주 출신이라는 이유만에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후삼국 시대, 청주 일대는 고려와 후백제의 격전장이었다. 통일신라시대 서원경인 청주는 아무래도 양측에서 군침을 삼킬만한 요충지였다. 지리적으로도 노른자위에 해당되지만 서원경의 오랜 역사와 문화는 후삼국의 정치기반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어떤 변수로 작용했던 것이다.
 청주가 이(齒)라면 청주의 남북에 위치한 문의와 진천은 바로 입술에 해당하였다. 고려의 유금필은 진천에서, 후백제의 길환(吉奐)은 연산군(燕山郡ㆍ문의)에서 청주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유금필이 진천을 진주(鎭州)라 칭한 것은 청주를 진압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고려 태조 8년(925), 유금필은 연산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길환이 전사하였다. 그후로 연산은 고려의 영향권에 편입케 된다. 신라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이었다가 경덕왕때 연산으로 개칭된 문의에는 양성산성(養性山城ㆍ壤城山城), 작두산성(鵲頭山城), 구룡산성(九龍山城) 등 여러개의 산성이 역사라는 장거리 코스에서 바통을 주고 받는 듯 이웃해 있다.

 이중 양성산성은 문의 면소재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문의 일대를 방어하던 역사의 선봉장이다. 후백제의 길환은 이 전투에서 분전했으나 망국의 한과 부활의 꿈을 접은채 산성의 성벽에서 조용히 잠들었다.
 사극 「태조 왕건」에 나오는 또하나의 중요한 인물이 바로 「공직」이다. 공직은 원래 문의 염티 너머에 있는 매곡성(昧谷城ㆍ회인) 성주다. 후백제 견훤의 심복이 되었다가 932년(태조 15) 고려에 귀속하여 대상(大相)이 되었다.

 두 아들과 딸을 두고 고려행을 결행한 공직에게는 나름대로 고민과 갈등이 있었다. 연산 출신이었던 그는 견훤의 심복이었으나 국운의 쇠잔과 함께 후백제의 사치와 무도(無道)에 적잖은 환멸을 느낀 것이다.
 상대적으로 왕건은 넓은 마음으로 그를 기꺼이 받아 큰 벼슬을 내렸으니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것은 오랜 역사가 말해주는 관성의 법칙이다.

 후백제와 고려가 쟁패를 거듭하던 양성산성에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들고 있다. 성돌밑에 숨어 있던 냉이, 씀바귀가 고개를 치켜 든다. 옛 성에 봄은 어김없이 찾아오건만 그때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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