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풍경은 눈뜸이다. 얼었던 대지에 새싹이 움트는 눈뜸이고, 꽃들이 햇살을 보며 트림하는 눈뜸이다. 생명에 대한 눈뜸이며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다. 사람에게도 풍경이 있다. 그 풍경은 자연처럼 스스로 만들어 간다. 나만의 숨결이요 향기이며 멋이자 사랑이다. 삶의 깊어갈수록 풍경도 진하고 깊어간다.

종교적 행위도 마음에 대한 눈뜸이다. 저마다의 굴곡진 삶과 사연, 그 사연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은 언제나 헐렁하다. 욕망의 오벨리스크 때문에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릇된 길을 간 적이 얼마나 많던가. 그 상처는 고스란히 내게 돌아온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삶은 찰나일 뿐이고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하느님의 시선에서 보면 생명의 존엄과 그 위대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마음은 행운이 깃드는 정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마음수련을 위해 십자가 앞에 선다. 나는 4년 전에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토마스 아퀴나스. 성서를 체계화시키고 철학적 기반을 다진 신학자다. 그 뜻을 마음에 담아 신앙생활을 하겠노라 다짐했다. 지금도 성당에서 "아멘"소리만 나도 눈물이 쏟아진다. 지은 죄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현명해질 수 있을지. 언제나 하느님 곁의 착한 목자가 될 수 있을지 성찰의 시간이다.

삶이란 탕자처럼 방황의 끝에서 돌아와 당신의 어깨에 기대어 삿된 욕망을 풀어놓고 희망과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진한 땀방울 흘리며 값진 성찬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순례자의 길이 아닐까. 세상의 모든 처녀성에는 생사를 넘나드는 모험이 뒤따른다. 북풍한설을 견뎌야 하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의 터널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 숱한 비난과 박해를 딛지 않고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다.

여기는 제천 배론성지. 첩첩산중에 은거하며 신앙을 지키고 증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아픔의 시간을 견뎠을까. 견딤이 쓰임을 만든다고 했다. 당신의 피와 땀과 눈물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세월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는 고귀한 목숨까지 내어 준 순교자의 넋이 서려있다. 그 정신과 그 가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801년, 천주교가 조선 땅 곳곳에 심어지자 박해가 시작됐다. 교인들은 이곳 배론 산골로 숨어들었다. 산의 형세가 배의 밑바닥을 닮았기 때문에 배론이라 부른다. 이곳에서 황사현 알렉시오는 토굴 생활을 하며 천주교도의 구원을 요청하는 백서를 집필하고 교우들과 옹기를 구우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 백서 원본은 현재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황사현 알렉시오는 한림학사 석범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했고 정약종에게 사사했다. 과거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정약종의 형인 약현의 딸 명련과 결혼했다.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신앙을 전파하며 백성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유박해가 시작되면서 이곳으로 피신해 은거했다. 박해의 전말을 알리고 조선교회 재건책을 제시하는 백서를 작성해 중국 베이징 주교에게 보내려고 했으나 토벌꾼들에게 발각되었다. 그 해 9월 서울로 압송된 뒤 11월에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했다.

1855년, 우리나라 최초로 사제 배출을 위한 성요셉신학교가 이곳에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가르치던 외국인 신부와 신학생들은 이듬해 병인박해 때 순교했고 신학교는 폐쇄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이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의 묘소가 있다. 병인박해의 첫 순교자 남종삼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종교적인 시선에서 볼 때 믿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염원이다. 인간의 일은 언제나 헐렁하고 나약하다. 그래서 신에게 의존한다. 상처입는 영혼을 치유받고 새로운 희망의 문을 열고자 한다. 그래서 성직자의 길은 더욱 엄중하다.

지금 배론성지에 만화방창 꽃들의 낙원이다. 순례자의 길을 자박자박 걷는 풍경이 한유롭다. 간절하면 이루어질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순교자들을 위해 성호를 긋는다. 이곳에서 삿된 생각 버리고 마음의 정원을 가꾸면 좋겠다. 글·사진 / 변광섭(컬처디자이너,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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