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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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 지하철 역사 안을 걷는데 저 문장을 인용한 글이 눈에 들어왔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으로 평소 좋아하는 문장이라 발길을 멈추었다. 유심히 읽다 보니 실소를 넘어 실망이 내게서 나오고 있었다. 쓰신 분은 어느 교회의 목사이다. 그의 논조는 버나드 쇼가 인생을 우물쭈물 방황하며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쓰라린 회한을 품은채 죽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단정을 하고는 이어나갔다. 단한번의 인생에서 후회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신앙에 입각한 그의 말 전부에 딴지를 걸 생각은 없다. 그는 목사로서 자신의 신념 체계와 사상이 있을 것이다. 내 눈에 거슬린 것은 버나드 쇼의 그 문장을 회한 일변도로 본 점이다.

물론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 또 그래야 한다. 다양성은 인류 역사의 오랜 질곡을 뚫고 나온 귀중한 선물이다. 그러기에 그처럼 해석을 해도 무방하긴 하다. 만약 그가 공인이 아닌 개인이라면 나는 그의 해석을 그냥 인정하면 된다. 그런데 그는 공인이기에 그가 공적으로 쓴 글은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짚고 싶은 것은 번역의 문제이다. 버나드 쇼의 원문은 우리나라에서 애초에 다르게 번역될 수도 있었다. '내 언젠가는 이 꼴 날지 알았지' 이렇게 번역되는 것도 하나의 길이다. 원문의 세계와 뉘앙스를 고스란히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원문과의 거리를 생각하면 오역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일랜드가 낳은 뛰어난 극작가인 버나드 쇼는 사회 개혁을 위해 허위의식에도 매섭게 비판적이었다. 그의 천부적 재능이자 무기인 위트(wit)는 그 속에서도 찬란한 빛을 발했다. '당신의 머리와 나의 미모가 합쳐지면 아주 훌륭한 아이가 태어날 거예요' '외모는 나를 닮고 머리는 당신을 닮는다면 어쩌겠소' 전설적인 무용가인 이사도라 던컨과의 이 대화로도 유명한 그이다. 그런 그는 스스로 생각해 쓴 묘지명에 견지해온 사상을 위트로서 표현했을 것이다. 또한 '이럴 줄 알았지'에서의 '알았지'는 영어 원문으로 Knew 즉 과거형이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알았다는 것이다. 지금 후회한다는 식으로 편협하게 쓰여졌다기보단 인생의 묘미와 허무 등등을 이미 꿰뚫고 있다고 풍부하게 해석될만하다. 그 촌철살인은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겨냥할 수도 있다. 그의 묘비명이 쉽게 해석될 성격은 아니지만 일부가 이렇게 해석되어도 오류는 아닐 듯하다. 그렇듯 버나드 쇼는 자신의 최후에도 정체성에 맞는 걸작의 글을 남기고 싶었을 듯하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자기 스타일의 문장으로 삶을 장식하고 싶었을지도. 그의 우물쭈물은 인생과 세계의 다채로운 길 사이에서 방황도 하고 헤매기도 하면서 사유와 향유의 꽃가루들을 냄새 맡아온 빼어난 방법론은 아닐까. 그의 삶 전체를 압축한 것이 그의 묘비명 아닐까.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이렇게 이해해온 나는 그것이 회한 일변도로 단정되는 것에 거부감이 일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경직되고 해석의 여지가 애초 봉쇄된 낡은 틀에 대한 사례의 하나일 것이다. 문자적 해석이 되어야 할 때도 있지만 문화적 해석이 필요할 때가 있다. 적용이 잘못되면 폐해는 사회로 돌아간다. 사회의 공기가 무거워진다. 관점과 해석의 풍요로운 다양성에 더욱 열려 나간다면 사회가 한결 윤택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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