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최고 가게] Since 1958 옥천 '몰랐지 상회'
방수웅·정화목 부부, 11평서 대물림 운영…'복덩어리' 의미
파리채·밧줄·양파망 등 수백가지 품목 취급…가격은 척척 외워
시장서 가장 일찍 문열고 가장 늦게 닫는 '부지런함' 장수비결

옥천공설시장 내에 있는 '몰랐지상회'는 '있는 것 다 있고 없는 것도 없는' 만물잡화점이다. 황해도 황주출신의 아버지를 따라 피난길에 올랐던 방수웅(76) 사장이 2대째 운영하고 있다. 방수웅 사장과 부인 정화목(74)씨가 60년 된 가게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김용수

[중부매일 김미정 기자] 있을 거 다 있고, 없는 것도 없는 만물잡화점. 옥천군 옥천읍 금구리 옥천공설시장에 있는 '여러가지상회 몰랐지'는 60년 된 잡화점이다. 여러가지를 다 판다는 의미에서 가게 이름도 '여러가지상회 몰랐지'다.

"못 구하는 물건 있으면 다 우리집으로 왔어요. 우리 가게에는 다 있으니까."(방수웅)

방수웅(76)·정화목(74) 사장 부부는 2대째 한 자리에서 60년간 가게를 지키고 있다. 11평(36.3㎡)의 공간에는 수백가지의 물건들이 빼곡하게 진열돼있다. 250원짜리 도루코 칼에서부터 각종 농기구, 일회용 라이터, 파리채, 밧줄, 벨트, 모자, 지퍼, 나이론 끈, 노트, 볼펜, 심지어 양파망까지 취급한다. 수십년 전 출시됐던 옛 물건들도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판매하는 품목이 몇 가지냐고? 우리도 셀 수가 없지."(방수웅)

"옥천 죽향초등학교에서 '학용품 박물관' 만들 때 옛 학용품들을 우리 가게에서 구해서 가져갔어요. 10년 전쯤에…"(정화목)

70대 노장의 사장, 수백가지 품목의 가격도 척척 왼다. 물건가격을 물어보는 손님의 질문에 한번도 멈칫한 적이 없다.

"볼펜 200원, 도루코 칼 4개에 1천원, 일회용 비닐팩 3천원…"(정화목)

한번 들으면 까먹지 않을만큼 가게 이름이 독특하고 재밌다. 방 사장이 직접 지었다.
 

옥천공설시장 토박이 상인으로 '몰랐지상회'를 운영하고 있는 방수웅(76) 사장이 어려웠던 지난 세월을 회상하고 있다. / 김용수

"22살에, 군 생활 할 때 종로4가 평화극장에서 서영춘·구봉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봤어요. 당시 "몰랐지?" 라는 말이 한창 유행할 때였는데 "살살이 몰랐지?" 그 말이 그렇게 재밌더라고. 그래서 '옥천에서 이런 물건이 여기에 있을지 몰랐지?' 하는 뜻에서 가게 이름을 지었죠. (웃음)"

옥천공설시장은 옥천의 중심가에 있다. 5일, 10일 장이 서는 공설시장은 옥천이나 안남, 안내, 군서, 군북 주민들이 농사지은 농산물을 가져와 팔거나 삼삼오오 모여막걸리 한 잔 하며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풀어놓던 정겨운 곳이다.

"옥천 5일장이 서면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걸려서 걸어다니질 못할 정도였어요. 명절때나 학기 초에는 가게에도 사람이 많았죠. 근처에 옥천중학교가 있는데 이 길로 학교를 다녔으니까 학생들이 많이 왔었어요. 학용품 파는 데가 여기 하나였으니까."(정화목)

"5일장은 '촌놈 생일'이라고 하잖아요. 사람들이 북적대서 좋았지요."(방수웅)
 

옥천공설시장의 60년 터줏대감 '몰랐지상회' / 김용수

'몰랐지상회'는 옥천공설시장에서 가장 문을 일찍 열고 가장 늦게 닫는 가게로도 유명하다. 60년간 줄곧 그랬다.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장수비결중 하나다.

"지금은 아침 7시에 가게 문 열지만, 예전에는 새벽 5~6시에 열어서 밤 11시까지 일했어요. 지금껏 어디 놀러 가보기를 했나 장사만 했죠."(방수웅)

"손님이 가게에 왔다가 그냥 갈까봐 걱정에 문도 못 닫았어요. 하루 문 닫으면 다음날 와서 왜 문닫았냐고 하더라고…."(정화목)

365일 연중무휴 영업에 장사가 힘들었다는 부부는 그래서 가게의 3대 대물림 계획은 일찍감치 접었다.

시장의 60년 터줏대감으로서, 시장내 점포 위치, 역사 등에 대한 문의라면 상인들이 "몰랐지상회 가서 물어보라"고 할 정도다.

"옥천시장은 옛날에는 우(牛)시장이 유명했어요. 우시장이 우리 가게 뒷편에 있었는데 지금은 외지로 나갔죠. 옥천시장에는 생선장수가 없어요. 평소에는 생선을 못 팔고 장날에만 있어요."(방수웅)
 

'몰랐지상회' 방수웅 사장이 부친의 손때가 묻은 돈통을 대를 이어 사용하고 있다. 1원, 2원 동전시절 때부터 지금까지 50년 넘게 쓰고 있다./ 김용수

가게 계산대 위에는 오래된 나무금고(돈통) 하나가 자리를 틀고 있다. 오랜 세월 사용한 손때가 까맣게 올라와있고, 이음새 부분은 헤어져 청테이프로 동여매놓았다.

"이 금고가 돈을 많이 벌어줬지요. 아버지 때부터 사용했으니까 한 50년은 넘었어요. 오동나무로 직접 만드셨어요. 옛날에는 1원, 2원씩 거래하던 때였으니까 금고에 돈이 꽉 차기는 어려웠지만, 금고가 차면 기분이 좋았어요."(방수웅)

'몰랐지상회'의 역사이자 희로애락의 징표인 나무금고는 이들을 웃게 했지만, 울게도 했다.

"20년 전 쯤인가, 비오는 날 우산을 사겠다고 한 남자가 들어왔어요. 우산을 펴서 금고 위에다 올려놓고는 나 보고 자꾸 뭘 갖다달라고 하더라고요. 물건 찾아가지고 왔더니 금고 안에 있던 돈을 몽땅 갖고 도망갔더라고. 하루 번 돈, 다 날린 거죠."(정화목)

그 날만 기억하면 아직도 속상하다며 정 사장은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방수옹 사장이 본보와 인터뷰 도중 6.25때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당시 방 사장은 7살이었다. / 김용수

1대 사장이자, 방 사장의 아버지 故 방덕심씨는 이북 황해도 출신이다. 면장을 지냈다. 6.25때 일가족이 피난와 옥천에 정착했다. 장남이었던 방 사장은 당시 7살이었다. 아버지는 5일장이 설 때마다 어깨에 나무판을 둘러메고 이것저것을 팔았었다. 그렇게 몇년 뒤, 지금의 자리에 잡화점을 연 것이다.

"아버지가 면장 출신이셨는데 글씨를 참 잘 쓰셨어요. 옥천에서 군수, 경찰서장 만사를 우리 아버지가 썼어요. 돈도 안 받았어요. 글씨 써주면 담배, 술 같은 걸 그 양반들이 선물로 줬지요."(방수웅)

지난달 남북정상회담을 물꼬로 남북관계에 훈풍이 불면서 가슴속에만 묻어뒀던 고향에 그리움이 커지고 있다.

"고향땅 밟아보고 싶죠. 통일되면 금강산에 한번 가보고 싶어요."(방수웅)

'몰랐지상회'가 자신들에게 '복덩어리' 같은 의미라는 방수웅·정화목 부부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7시에 문을 열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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