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최고 가게] 7. Since 1955 증평 '장동이발관'

 14살 때 이발 일을 시작해 19살에 증평 '장동이발관' 운영을 시작한 '70세 가위손' 박해진 사장이 50년 넘게 사용한 '바리캉'(전동식 이발기계)을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 사장은 "예전엔 '이발사'가 천한 직업이라고 생각을 했으나 지금은 퇴직 없는 평생 직업으로 보람을 느끼고 있다"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김용수 

[중부매일 김미정 기자] "옛날에는 이발관에서도 여학생들 단발머리, 상고머리 다 했었는데 미장원 활성화되면서부터 없어졌지. 남자들도 다 미용실로 가는데 뭘…"

충북 증평군 증평읍 장동리 '장동이발관'은 1955년부터 한 자리를 지켜왔다. 주인이 세번 바뀌어 지금은 3대 박해진(70) 사장이 56년째 맡고 있다. 

초가집이었던 방앗간을 수리했다는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흰 가운을 차려입은 박해진 사장이 활짝 웃으며 손님을 맞이한다. 5평의 가게 안에는 옛 이발의자 세 개, 나무 거울과 나무 장식장, 흰 타일을 조각조각 붙여 만든 세면 개수대, 오래된 철제 의자 등이 '세월'의 나이를 보여준다. 모두 50년은 족히 사용해온 것들이다.

"가위는 (칼날을) 갈아서 썼었는데 지금은 새로 사야 해요. 가위 하나 가는데 당시 1만원이었는데 1년은 써요."

증평 토박이인 박 사장은 전통방식으로 이발과 면도, 염색을 한다. 50년 넘게 사용해온 바리캉(전동식 이발기계), 오래 사용해 칼날이 무뎌진 가위 등을 잘 모셔두고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그의 손때 묻은 애장품들이다.

"옛날보다는 머리 깎는 게 쉬워졌어요. 지금은 기계로 하니까. 옛날에는 가위질 하니까 손목에 붕대 감고 일했었는데…."
 

증평 장동이발관 박해진 사장이 50년 넘게 사용한 '바리캉' 이발기구. / 김용수

'70세 가위손' 박해진 사장은 14살에 가위를 잡았다. 16살 터울의 사촌형이 당시 지금 자리에서 '장동이발관'을 운영하고 있어서 그때 발을 들여놓았다. 이어 19살에 '이용사 면허증'을 품에 안았고 이듬해인 20살에 '장동이발관'의 사장이 됐다. 

"중학교 가려고 입학절차 다 해놨었는데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이발일을 하게 됐어요."

가게 한 벽면에는 1968년에 딴 '이용사 면허증'과 1969년 그가 가게를 인수한 '영업신고증'이 액자에 나란히 걸려있다. 박 사장의 이발경력과 가게의 역사를 말해주는 '자랑스러운 훈장' 같은 것이다.

"도청 가서 시험을 쳤어요. 나이 어려서 '이용사 면허증'을 땄으니까 기분이 좋았어요. 얼른 가게 차려야겠다는 생각이었죠."

3년간 세 들어 살다가 빚 900만원을 지고 가게를 샀을 때에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단다. 빚을 다 갚기까지는 4년이 걸렸다. 90년대 호황기에는 작은 가게에도 손님이 북적였다. 17년간 줄곧 직원 1명을 두고 일했다.

"장사가 잘 됐어요. 하루에 20명은 (커트를) 깎았어요. 혼자서는 10명 깎기도 어려워요. 지금은 미장원으로 많이 가니까 옛날같지 않아요. 하루에 5명도 오고, 어떤 날은 10명도 오고…."
 

장동이발관을 찾은 사람들은 대부분 50년 지기 친구들이다. 박해진 사장이 손님의 머리를 깎고 있다. / 김용수

손님들은 대부분 수십년 단골들이다. 같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친구'처럼 지낸다.

30년 단골 김용관(66)씨는 한달에 한번씩 머리를 한단다. 이날은 머리염색과 면도를 했다. 커트와 면도는 40분, 염색을 하면 2시간이 걸린다.

"머리만 잘 하는 곳도 있는데 여긴 이발도 깔끔하게 잘하고 친밀감도 있으니까 좋지요."

50년 단골이자 증평초 30회 동창인 김용철(69)씨는 이틀에 한번꼴로 가게에 들른다. 머리는 보름에 한번꼴로 만지지만, 얘기 나누는 재미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들른단다. 김씨는 박 사장을 '일벌거지(일중독자)'라며 노는 날에도 일을 한다고 놀렸다.

"나이 먹을수록 추하게 보이면 안되니까 머리를 자주 해요. 증평 인근 도안, 사리, 청안 다 여기 와서 머리 해요."
 

장동이발관을 찾은 사람들은 대부분 50년 지기 친구들이다. 오랜 친구들이 찾은 이발관처럼 내부인테리어도 70년대 옛 모습 그대로다. 뒤로 누울 수 있는 손님들이 앉는 이발의자, 타일로 장식된 세면대 등이 지금을 볼 수 없는 옛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 김용수

가게는 오전 7시에 문을 열어 저녁 8시에 닫는다. 옛날에는 새벽 5시에 열어 저녁 9시까지 쉼없이 일했다. 가게 문을 열기 전에는 매일 새벽 4시부터 근처 증평읍 사공리 자신의 논에 들러 농작물을 돌본다.

"갑자기 손이 말을 안 들어서 면도가 안 올려지는 거야. 병원 갔더니 두 군데가 막혔다고 하더라고요. 일주일간 입원했었어요."

2006년 뇌경색으로 쓰러졌던 악몽을 꺼냈다. 하루종일 서서 일하는 것이 힘들었다면서,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면서 미소를 보였다.

"이 일이 고달픈 일이에요. 아무리 손님께서 저한테 기분 나쁘게 해도 참고 일해요. 남 보기에는 신사 같아 보여도 '창살 없는 감옥' 같아요."

그는 일이 힘들어도 웃고, 즐거워도 웃는다. 긍정적인 마인드가 가게의 장수비결 중 하나다.

"기억에 남는 일이요? 힘들었던 거죠. 여적까지(여태껏) 고생만 했으니까. 여러번 (이발관을) 관둘까도 생각했는데 옛날에는 이발사가 '천한 직업'이었는데 이제는 '좋은 직업'이에요. 친구들이 저한테 "퇴직이 없어서 까딱없다"고 해요."
 

장동이발관을 찾은 사람들은 대부분 50년 지기 친구들이다. 박해진 사장이 손님의 머리를 깎고 있다. / 김용수

56년간 변함없이 한 자리에서 한 길을 걸어온 박해진 사장에게 장동이발관은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 같은 존재다.

"장동이발관은 저한테 '구세주'에요. 평생 나를 살려줬다고 생각해요. 별것 아닌 사람인데 손님들이 나를 잊지 않고 찾아와줘서 고맙지요. 빚을 갚아야 하는데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제 그의 나이 일흔, 아직 더 일하고 싶다.

"나이가 70이 되니까 생각이 급해져요. 이것도 해야겠고 저것도 해야겠고…. 하루에 두 명을 깎든, 세 명을 깎든 손 안 떨리고 일할 수 있을 때까지 할 거예요."

내 손으로 사람들을 더 멋있어 보이게 해주는 것이 보람이라는 박해진 사장은 오늘도 가위와 빗을 잡고 단골들의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더 젊게, 더 멋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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