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칼럼] 한인섭

8일 내정된 노영민 주중대사는 따지고 보면 대통령 비서실장 3수생(三修生)이다. 그가 처음으로 비서실장에 임명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은 2012년 대통령 선거 때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통합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 당적으로 출마해 분패했던 시절 그는 후보 비서실장 이었다. 그는 사석에서 후보 비서실장으로서 경험한 극적인 상황을 털어 놓은 적이 있다.

2012년 12월 19일은 문재인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격전을 치렀던 투표일 이었다. 노 대사는 이날 오후 3시께 미국 백악관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문 후보와의 당선 축하 전화통화를 위한 '의전'을 협의하려는 것 이었다. 이를테면 통화 장소부터 유선으로 할지, 휴대폰을 사용할지, 통역은 누가 할지 등을 조율하는 것 이었다. 백악관 의전 파트에서는 당시 박근혜 후보와도 같은내용을 조율했을 게 뻔하다. 그러나 당사자 위치가 되면 객관적 판단을 하기 쉽지 않다. '이 사람들이 뭔가 알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기 십상이다.

신임 노 실장 역시 "문 후보가 당선되면 난 뭘 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한다. 캠프의 역할대로 비서실장을 해야할지, 입각을 해야할지 여부도 뇌리를 맴돌았다. 입각을 한다면 어떤 자리를 맡아야 할까…. 다시 총선에 도전해 국회에서 중요한 일을 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개표 윤곽이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부푼 기대감을 한순간도 접을 수 없었다 한다. 패배로 끝났지만, 백악관 전화를 받은 후 몇시간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 이었는지도 모른다.

2017년 5월 9일 치러진 19대 대통령선거는 비서실장에 한걸음 더 근접했다. '시집 강매' 논란에도 불구하고 20대 총선 출마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그는 김종인이 주도했던 비상대책위원회가 공천배제에 해당하는 '당원자격정지 6개월' 징계를 내려 한방에 주저 앉았다. 권력무상을 실감했을 정도로 정치적 고난을 겪었다는 그는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캠프의 '사령탑'이나 다름없는 공동조직본부장을 맡았다. 승리가 확실시되는 권력의 '정점' 이었다. 결과가 너무 뻔했던 선거라 투표일이 2~3일 앞으로 다가오자 캠프에서는 그를 "(비서)실장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5월 8일 청주와 서울로 이어진 마지막 유세에 이어 선거일 이었던 9일 심야까지 이어진 '조각 회의'에서 '시집 강매'에 발목이 잡힌 그는 주중 대사로 밀려났다.

권력의 속성은 본래 중심에 근접할 수록 '원심력'이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 무게를 지닌 실세일수록 중심에서 일단 벗어나면 다시 복귀하기가 더 어렵다고 한다. 아마도 노영민 주중대사를 이렇게 봤던 이들도 제법 있었을 게다.

한인섭 편집국장
한인섭 편집국장

그랬던 그가 권력의 중심으로 복귀했다. 국회의원 배지는 청주 흥덕에서 내리 3선을 했지만, 비서실장은 3수를 한 셈이다. 굳이 이런 표현을 한 것은 임종석 비서실장과 달리 안정성을 보여 줘야한다는 주문 때문이다. 임 전 실장을 경박하게 보는 세간의 평가를 자초한 사건은 알다시피 '전방 부대 선글래스 방문' 이었다. 얼룩무늬 군복과 철모, 선글래스를 착용한 그는 지난해 10월 17일 서훈 국정원장, 정경두 국방부 장관, 조명균 통일부 장관을 데리고 강원도 철원 육군 5사단을 찾는 '호기(豪氣)'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비서실장 말년 민정수석실 파견 검찰 6급 직원에게 '하이킥'에 '발리킥'까지 경험해야 했다.

신임 노영민 실장이 이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목표를 이룬 3수생의 처신처럼 '숙성된 맛'을 보여야 한다. '그림자 권력'이라는 말처럼 그 자체로 무게감을 보여야 할 것 같다. 모처럼 충북 출신이 이른바 '권력의 정점'에 섰다. 그래서 지역에서는 그에게 바람도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행정공무원 출신이 아니라는 점이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할 게 아니라 정치인 다운 과감한 모습도 보여달라는 주문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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