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잃은 고통에 충남 예산서 제천 송학면까지 '들불처럼'

[중부매일 유창림 기자] 충청권 3·1운동은 3월 3일 충남 예산을 시작으로 4월 18~19일 충북 제천 송학면 시위까지 총 201건(충남 117건, 충북 84건) 전개된 것으로 최초 공개됐다.예산에서 시작된 충남지역 3·1운동은 부여, 서천, 논산, 당진, 아산, 연기, 공주, 천안 등으로 이어졌다. 충북에서는 3월 19일 괴산을 시작으로 진천, 청주, 옥천, 음성, 영동 등으로 확산됐다. 충청지역 3·1운동의 절정은 4월 첫 주(3월31일~4월6일)로 볼 수 있으며, 특히 4월 1일~4일 펼쳐진 3·1운동이 총 94건으로 집계됐다. 일자별로는 3월 31일 11건, 4월 1일 29건, 2일 20건, 3일 24건, 4일 21건, 5일 9건, 6일 6건으로 이 기간 충청지역 3·1운동의 절반이 넘는 120건의 운동의 전개됐다.

충청지역 201건의 3·1운동에 ▶충남에서는 최소 5만8천113명, 최대 7만2천629명이 ▶충북에서는 최소 3만6천338명, 최대 4만5천328명이 참여했으며 38개 시위현장에서 발포 및 발검에 의한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망자는 ▶충남 최소 46명, 최대 65명 ▶충북 최소 37명, 최대 43명으로 집계됐다.

지역별로는 충청권 대부분에서 3·1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확인됐다.

충북의 경우 청주가 19건으로 가장 많은 횟수의 3·1운동이 전개됐다. 이외 음성 18건, 괴산 15건, 영동 12건, 보은 7건, 옥천 5건, 진천 5건, 제천 2건, 충주 1건의 3·1운동이 발생했다.

충남의 경우 연기에서 15건의 3·1운동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으며, 공주 14건, 예산 12건, 논산 11건, 청양 11건, 서산 10건, 천안 10건, 홍성 10건, 아산 9건, 대전 8건, 당진 3건, 서천 3건, 부여 1건으로 뒤를 이었다.

이 같은 구체적 수치와 일자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최근 공개한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중부매일이 섹션별 검색을 통해 확인됐다.

국사편찬위는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공개 안내글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국외에서 일어난 3·1운동은 너무나 거대했기 때문에 100주년을 맞이하는 현재까지 전체와 세부를 아우르는 총체적 실상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에 국사편찬위원회는 2016년부터 3년에 걸쳐 3·1운동 관련 기초 정보를 종합하고 GIS(지리정보체계)와 연동해 제공하는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고 밝혔다.

 

-충청권 첫 3·1운동, 3월3일 충남 예산시위

3월3일 오후 8시 30분경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면 예산리에서 윤칠영 등 5명이 음주를 하며 '유학생 등이 단결해 한국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풍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11시 30분경 동쪽 산 위로 올라가서 대한국독립만세를 연호했다. 예산헌병분대에 체포된 이들은 독립운동 관련 연계 조직이 없고 평소 온순하게 생업에 종사하며 불온 과격한 언동을 한 적이 없다는 등의 사유로 훈계를 받고 방면됐다.
 


-충청지역 최초의 집단 항의, 3월 14일 공주 신상면시위

3월 14일 오후 4시경 충청남도 공주군 신상면 유구 시장에서 황병주는 장날 시장에 모인 약 30명의 군중에게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권유하고 만세를 외쳤다. 이어 만세 군중들이 우시장으로 이동할 때 일경의 제지를 받았다. 그러나 약 500명으로 늘어난 군중들은 불응하며 계속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경은 순사보를 시켜 황병주를 유구경찰관주재소로 끌고 가게 했다. 군중들은 뒤따라 주재소로 가서 '황병주를 돌려보내라'고 항의하며 돌을 던지고 막대기를 휘둘러 주재소를 공격했다. 급보를 접한 공주경찰서는 일경 6명과 수비대 보병 하사 이하 6명을 유구로 출동시켰다. 군경들이 합동해 32명이 체포되는 탄압을 함으로 만세 군중들은 해산했다.


-대전에서의 최초 3·1운동, 3월 16일 대전 유성면시위

3월 15일 충남 대전군 유성면 지족리 자택에서 이권수는 이상수와 함께 장날 유성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협의하고 구한국국기 1기를 제작해 마을 가운데 놓는 곳에 게양했다. 또 시장 군중들에게 배부할 작은 깃발 17기도 만들었다. 이들은 3월 16일 국기 18기를 가지고 유성 시장을 나갔다. 오후 1시경 이권수, 이상수는 이정석의 주막 앞에서 군중들에게 작은 깃발을 배부하고 이권수는 '대한국은 독립하게 될 것이다. 함께 만세를 부르자'라는 연설을 했다. 이어 먼저 깃발을 흔들며 대한국독립만세를 외치자, 부근에 있던 300명의 시장 군중들도 호응해 독립만세를 불렀다.


-충북에서의 최초 3·1운동, 3월 19일 충북 괴산시위

3월 15일 고종 국장을 참례하기 위해 상경했던 홍명희는 동부리 자택으로 귀가해 괴산공립보통학교의 주요 학생들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했다. 3월 17일~18일경 홍명희는 자택에서 이재성, 홍용식과 '최후의 1인까지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의 선언서 300매를 인쇄했다. 3월 19일 먼저 괴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읍내를 활보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괴산경찰서 일경들은 학생 3명을 체포해 경찰서에 구금하고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오후 5시경 홍명희, 이재성, 홍용식은 괴산 시장에 나아가 흩어져 있던 학생 수십 명을 이끌고 선언서를 군중들에게 배포하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독립운동을 하자고 권유했다. 학생들은 종이로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 만세 군중들은 괴산경찰서에서 구금자들을 탈출시키려고 시도했다. 일경들은 군대와 함께 진압을 시작해 29명을 체포했다.

 

-충청권 최초의 봉화시위, 3월 23일 청주 군내 봉화시위

3월 23일 오후 9시 충청북도 청주군 강내면 대성리에서 조동식이 주민 수십 명에게 권유해 마을 부근 산 정상에 올라 불을 피우고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옛날 봉화를 올려 변란을 알리는 예(烽火告變之例)를 본받아 산 꼭대기에서 불을 피우고 만세를 외치면 일층 독립운동의 기세를 떨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주민들에게 권유했다. 이에 강내면 18리의 마을 주민 및 인접한 강외면, 옥산면의 일부 마을에서도 일시에 수십 개소에서 불이 타오르고 만세 소리가 부근을 요동쳤다. 이후 경기도 일부까지 전파됐다. 청주와 조치원의 헌병과 수비대 보병들이 출동해 해산을 명령했다. 주민들은 다음날인 3월 24일 오전 1시에 귀가했다. 헌병들은 체포한 주민들이 주도 인사가 아니라며 훈계 방면했다. 이후 헌병들이 주도 인사를 검거하고자 했으나 주민들의 저항으로 검거하지 못했다.

 

-영동군 영동교 태극기 게양

3월 25일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면 계산리 영동시장 남쪽 영동교 다리 근처에 넓이 4척(尺) 크기의 구한국기에 '大韓國獨立萬歲'라 적힌 깃발이 달렸다. 또 부근 각처에 종이로 만든 깃발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에 영동경찰서 일경들이 순찰 중에 발견하고 구한국기와 종이 깃발 약 150기를 수거했다.

 

-충청권 3·1운동서 일 헌병 최초로 발포, 3월 27일 충북 옥천 이원시위

3월 15일경 충청북도 옥천군 이남면 수묵리 육창문 집에서 육창주, 허상기는 3월 27일 이원 장날 독립만세운동 전개에 대해 협의했다. 육창주는 3월 26일 자택에서 구한국국기 3기를 제작했다. 3월 27일 이원 시장 주막에서 주민들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했다. 오후 1시경 이들은 약 100명의 시장 군중들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용이, 허량, 공재익, 조기시, 최덕용, 이금봉, 김수원 등이 합세해 만세를 외치며 시장 일대를 활보했다. 이원헌병주재소 헌병들과 군청 직원들이 나서서 군중들에게 해산을 명령했으나 약 700명으로 늘어난 군중들은 계속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헌병과 보조원은 국기를 빼앗아 주재소에 보관하겠다며 가져가고 육창주, 허상기를 체포해 끌고 갔다. 군중들은 뒤따라 주재소로 가서 체포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와 헌병들을 공격했다. 그러자 헌병들은 발포해 현장에서 1명을 사망시키고 5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오후 3시경 이일만이 동생의 시신을 주재소로 운구하고 헌병들에게 항의했다. 다시 집결한 군중은 또 다시 주재소와 헌병들을 공격했다. 보병 80연대 하사 이하 5명이 출동해 헌병을 지원하고 대전에서 장교 하사 병졸 21명이 도착해 진압함으로 오후 6시30분경 만세 군중들은 해산했으나 25명이 체포됐다.

 

-광부들이 주도한 3·1 만세 운동, 3월 28일 충남 천안 입장면 시위

3월 25일 충청남도 천안군 입장면 기노리에서 직산금광회사 고용인 박창신은 동료인 안은, 한근수 등 여러 명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해 동의를 얻었다. 이들은 3월 27일 박창신 집에서 구한국기 여려 기를 제작하고 3월 28일 오전 6시 30분경 금광 갱구 입구에서 갱부들을 권유해 약 200명과 함께 대한국독립만세를 외치며 입장 시장으로 향했다. 도중에 양대리에 도착한 군중들은 양대헌병주재소를 공격했다. 이에 주재소 헌병들이 총기를 발포해 3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당하는 무력 진압으로 만세 군중들은 해산했다. 천안에서 헌병 3명과 철도엄호대 수비병 보병 6명이 양대리로 급파돼 경계를 강화해 19명이 체포됐다.

 

-7명의 사망자 발생, 3월 30일 충북 괴산 청안면 시위

3월 30일 오후 3시 30분경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 청안 시장에서 김수백(김수복), 이태갑, 신강면, 장성원의 주도로 약 3천명의 군중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주도 인사 7명이 일경에 붙잡혀 청안경찰관주재소로 연행되자, 김수백 등은 박내명(박순옥), 함재원 등 군중들을 이끌고 주재소로 가서 구금자를 석방하라 요구했다. 읍내리의 김명진, 안낙여, 임수근 등 7명도 시장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박홍균, 김종규 등이 체포되므로 주재소로 가서 석방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경이 체포자를 석방하지 않자 김명진이 군중들을 지휘하고 안낙여 등 6명은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유리 창문, 칸막이 문 등을 파손시켰다. 이에 일경들은 괴산에 파견된 충주 수비대의 하사 이하 7명과 총기를 발포해 7명을 살해했다.

 

-가장 뜨거웠던 그날 4월 1일, 충청권에서만 29건의 3·1 운동

4월 1일은 충청권에서 가장 많은 3·1 만세 운동이 전개된 날로 기록된다. 공주 공주면, 공주 장기면, 공주 정아면, 논산 강경면, 논산 두마면, 대전 대전면, 대전 유성면, 대전 치마, 연기 금남면, 연기 남면, 연기 서면, 천안 성환면, 천안 직산면, 천안 아우내장터, 홍성 금마면, 괴산 장연면, 괴산 청천면, 음성 대소면, 음성 소이면, 음성 음성면, 청주 강내면, 청주 강외면, 청주 부용면, 청주 북이면, 청주 북일면, 청주 사주면, 청주 오창면, 청주 옥산면, 충주 신니면 등 총 29건의 3·1 만세 운동이 밤낮으로 전개됐다.

 

-유관순 열사의 독립만세 외침,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 시위

3월 13일 경성의 3·1운동을 겪은 유관순은 고향인 충청남도 천안군 동면 용두리로 귀향해 4월 1일 독립만세를 계획했다. 부친 유중권, 유중무, 김용이, 조병호 등과 협의하며 준비하고 구한국국기를 제작했다. 4월 1일 이들은 사전 협의에 따라 시장 입구에서 시장에 오거나 떠나는 지역민들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했다. 오후 1시경 조인원 등의 인사들이 먼저 구한국국기를 흔들며 시장 군중 500~600명과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 군중들은 약 3천명에 이르렀다. 헌병들이 만세를 중지하고 해산하라며 제지하였으나 만세 군중들은 불응하며 계속 만세를 외치자 총기를 발포했다. 유중권 등 2명이 실탄을 맞고 중상을 당해 절명하거나 빈사 상태에 빠졌고 조인원도 왼쪽 가슴에 총상을 입고 왼쪽 팔은 총검에 상처를 입었다. 헌병의 무력 진압에 일시 군중들은 흩어졌다. 잠시 후 약 40명의 군중들은 재집결해 사망자의 시신을 주재소로 운구하고 헌병들에게 항의했다. 군중들은 주재소를 공격해 유리창, 경계 철조망, 유치장 벽 등을 파괴했다. 유관순도 부친의 상태를 확인하고 주재소장에게 '자신의 나라를 되찾으려고 하는 정당한 일을 하는데 어째서 군기(軍器)를 사용해 민족을 죽이느냐?'고 항변하고 군중을 향하는 헌병들의 총을 붙잡고 제지했다. 상황이 위급함을 느낀 헌병들이 일제히 사격을 자행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므로 만세 군중들은 피신할 밖에 없었다. 헌병과 보병들의 총기 발포와 무력 진압으로 61명이 부상을 당하고 부상자 중에 18명이 사망하고 24명이 체포됐다.
 

-역사에 기록된 충청권 마지막 3·1 운동, 4월 19일 제천 송학면 시위

4월 18일 충청북도 제천군 송학면 면사무소 앞뜰에서 최종률은 포전리 마을 주민 70여 명에게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권유하고 먼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다음날 4월 19일 오전 1시경 약 50명의 군중들이 면사무소에서 1리 정도 떨어진 면장 이종정 집으로 갔다. 군중들은 면장을 정원으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요구했으나 면장은 거부했다.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면장을 구타한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면장은 끝내 불응하고 오히려 '이는 분별없는 행동'이라고 강변하며 버티므로 만세 군중들은 해산했다.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참여한 독립기념관 최우석 연구원

최우석 연구원
최우석 연구원

"3·1운동의 연구는 판결문 등 일본측 자료에 의존했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지도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체계적이지 않다보니 실상을 정리하는데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번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구축은 더 좋은 체계로 역사적 데이터를 제공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독립기념관 최우석(37) 연구원은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참여했다. 데이터입력과 자료선정 부문에 참여했던 최 연구원은 이번 데이터베이스 구축 과정에서 3·1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다시 실감하고, 기존에 알고 있던 사실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이번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그동안 연구에서 등한시됐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문건과 도장관보고철이 적극 활용됐기 때문이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문건은 주로 영어로 정리가 돼 있다 보니 접근성이 떨어졌고, 지금의 도지사가 작성한 도장관보고철은 지방의 역사로 치부돼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최 연구원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2가지 종류의 3·1운동 자료를 추가하니 일본측 자료에 의존했던 3·1운동은 상당히 축소돼 전해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는 것.

같은 이유에서 최 연구원은 이번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통해 기존의 연구를 갱신하는데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구축된 만큼 보다 많은 국민이 3·1운동에 관심을 갖고 정신을 이어갔으면 한다는 바람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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