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김동우 YTN 충청취재본부장

과학기술은 날로 진보하고 있다. 그 진보는 삶의 질 향상과 안전을 추동해야 함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분명 과학기술 진보는 삶의 질 향상과 안전을 유도함과 동시에 인류 역시 갈수록 안전하고 행복해야 한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인류는 무엇인가에 늘 불안과 위협을 느끼고 있다. 툭하면 예상치 않은 대형 사고로 몰살(沒殺)하거나 비참하리만치 삶의 밑바닥이 드러난다. 이른바 인재(人災)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재난이 끊이지 않는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안전사회를 담보해야 하지만 그러하지 않다는 얘기다. 불안 정도가 진보를 위한 불가피성 부작용(side effects)이나 비용으로 치부하기엔 그 폐해(弊害)가 가공스럽다. 왜 그럴까? 과학기술 진보에 태생적 한계가 있다는 말인가?

이런 가공스러운 폐해를 신랄하게 지적한 사회학자가 있다. 독일 울리히 벡(Ulrich Beck)이다. 그는 1986년 5월 'Risikogesellshaft-위험사회'를 출간했다. 같은 해 4월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발생했다. 이 책은 이 원전사고가 과학기술의 최악의 부작용으로 대변되면서 사회학적 관심을 폭발적으로 불러일으켰다.

이 책의 골자는 현대 사회를 '위험사회'로 규정한 점이다. 이 위험사회는 '시한폭탄과 함께 만석의 승객을 싣고 달리는 열차'라고 보면 맞다. 그 시한폭탄의 폭발여부는 관건이 아니다. 불가피하게 탑승해 목적지까지 가야 하는 승객들의 예측 가능한 폭발 불안이 관건이다. 그가 주장한 위험은 참사(Catastrophe)가 아닌 참사 실현의 가능성이다.

그에 따르면 20세기 후반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른 근대화(Modernity)는 '안전과 행복' 속에 '불안전과 불행'을 부지불식간에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진보가 인류에게 재화(Goods)와 동시에 재난(Bads) 가능성도 주고 있다는 분석이다. 재화를 낳은 사회가 '산업사회'이고, 재난이 예측되는 사회가 바로 '위험사회'다. 위험사회의 도래는 과학기술이 '지식'만이 아닌 '무지'도 생산한 것에 그 원인이 있다.

많은 국가들은 과학기술 진보로 근대화되었다. 불안과 불행이 사라지고 안전과 행복이 찾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끝까지 그러하지 않았다. 근대화는 '풍요의 산업사회'를 '불안, 위해(危害, hazards)의 씨앗을 발아시키는 위험사회'로 변모시켰다.

특히 위험은 나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집합적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 그는 '위험은 스모그처럼 민주적'이라 했다. 위험은 빈부, 남녀노소, 지위고하, 인종, 지역 등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무차별적으로 덮친다는 말이다. 원전이 붕괴되지 않을까,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을까, 다리나 아파트가 붕괴되지 않을까 등등 기우(杞憂)가 공통적으로 내재화(Internalization)되고 있다. 위험사회가 진행되면 될수록 재화를 원하기보다 위험을 피하는 방법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국가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개인이 방법을 찾는 것이 위험사회의 특징이다. 국가는 과학기술을 끝까지 맹신하는 반면 사람들은 위험을 예측하기 때문이다.

김동우 YTN청주지국장
김동우 YTN청주지국장

그는 위험사회 대처법으로 '성찰적 근대화(Reflexive modernization)'를 제시한다. 우선 과학은 위험의 근원이자 해결책이라는 이중성을 인지해야 한다. 그다음 위험을 정확히 직시하면서 과학을 의심하고, 과학이 최고의 선이 아님을 반성하고, 과학을 더욱 과학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 사회 역시 위험사회다. 지나치게 앞만 보고 달려온 국가 주도형 근대화에 그 원인이 있다. '서구화'를 무비판적으로, 성찰 없이 '근대화'로 설정한 점도 '산업사회'를 '위험사회'로 탈바꿈시켰다. 한마디로 산업화가 낳은 위험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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