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어린 딸애 단옷날이면/옥 같은 살결 씻고 재단장했지/치마는 붉은 치마/머리 뒤엔 푸른 창포잎 꽂았었지'

다산 정약용이 딸을 위해 쓴 시의 일부이다. 저 시를 쓴 해가 1801년. 다산이 신유박해로 인해 강진으로 유배되어 단옷날에 쓴 것으로 보인다. 딸이 여덟살 되는 해였는데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싶다.

5년이 흐른 후에 다산은 부인 홍씨로부터 선물을 받는다. 자작시와 함께 생뚱맞게도 치마이다. 홍씨가 시집올 때 가져온 것으로 원래는 붉은 색인데 세월이 흘러 담황색으로 변해 있었다. 치마를 선물로 보내는 것은 지금도 예사롭진 않은 일인데 당시로서는 더욱 파격적인 일일 것이다. 그만큼 홍씨로선 무엇인가 절박하고 애끓는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다산은 부인의 시에서 운을 빌려 시를 짓고 치마는 마름질 해 보관해둔다.

몇 해가 또 흘러 다산은 그 치마 조각에 두 아들을 위한 정과 훈계를 적어 보낸다. 그리고 삼년이 더 흐른다.

이번엔 딸이 시집을 간다는 전갈을 받는다. 12년 동안 한번도 만나지 못한 딸이 어느덧 스무살이 되어 낭군을 따라 가는 것이다. 강진의 초당에 기거하던 다산은 고이 간직하던 치마 조각을 또 꺼낸다. 두 아들에게 보낸 서책 즉 하피첩이라는 것을 만들고 남은 조각이다.

매화를 거기에 그린다. 매화 가지엔 멥새 두 마리를 그린다. 단아한 싯귀도 적는다. 딸의 행복을 축원하는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매화병제도'라 불리는 시서화가 탄생되는 순간이다.

단옷날이면 붉은 치마를 입고 머리 뒤에 푸른 창포잎을 꽂던 딸. 붉었던 치마 조각에 그 딸을 위해 매화를 그려나갈 때 다산은 유배 초년의 단옷날에 그애가 그리워 지었던 시가 떠올랐을까. 그 시에도 붉은 치마가 적혔는데. 그 두 개의 붉은 치마가 그의 마음을 휘저었을까.

그랬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다산이 그 연관성을 느끼지 못했더라도 그의 무의식에선 벌건 빛이 매화를 그려나가는 손에 힘을 좀더 실어주었는지도 모른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어린 딸이 입었던 붉은 치마는 그애의 모친이자 다산의 부인인 홍씨가 입혀주었을 것이다. 홍씨는 외롭고 병든 몸으로 담황색으로 변한 뻘건 서정의 치마를 보낸다. 다산은 그것을 고이 간직해 두 아들에 이어 긴 유배 생활 동안 그리움 속에서만 만나던 딸을 위해 눈물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매화병제도의 바탕 천으로 쓰인 그 치마 조각이 내 마음을 왜 크게 흔들었을까. 붉은 색에서 변한 세월의 흔적 이상의 페이소스가 읽혀서였을까. 딸에 대한 다산의 절절한 그리움에 내가 감응되어서일까. 붉은 치마든 담황색 치마든 당시엔 흔한 일상의 물건일 것이다. 나는 그런 정서를 지니고 있음에도 거의 접하지 못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그런 결핍에 따른 갈증과 그리움이 내 안의 무의식을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통과 단절되다시피한 우리 사회의 아픈 면과 닿는 문제일 것이다.

사군자의 하나인 매화는 추운 겨울을 이겨낸 인내와 고결, 기품의 이미지를 지닌다. 담황색 치마에 그려지던 매화가 이번 봄엔 내게 더 압도적이어서 매화가 지려는 요즈음 내게 남은 서정의 천에도 매화가 그려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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