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김동우 YTN 충청본부장

"뭘 봐?"라는 용어를 기억하는가? 1970~80년 초반에는 주로 끈이 달려 손에 들거나 팔에 걸고 다니는 책가방이었다. 다소 불량한(?) 남학생들의 책가방에 이 '뭘 봐?'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것도 아주 굵은 글씨로 말이다. 아마 외국인이 봤다면 이 '뭘 봐?'가 책가방 브랜드라 착각했을 것이다. 왜 학생들은 책가방에 이런 글귀를 적고 다녔을까?

당시에는 공부에 관심이 먼, 다소 불량한 학생들의 저급한 유행이 '뭘 봐'에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친구가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했던 장난기로 치부했다. 하지만 그 행동에는 나름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학업 강요나 입시 지옥 등에 대한 소리 없는 반항이었다.

이것만은 아니었다. '뭘 봐'에는 '봐 줘야하는 주체'가 있었고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뭘 봐'는 '보지 말라'가 아니라 오히려 '봐 달라'의 역설이었다. '공부 못한다고 무시하거나 경멸하지 말고 잠깐만이라도 봐 달라'는 아주 간곡한 요청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그들의 요청대로 잠깐 '뭘 봐'라는 글귀와 함께 그들과 시선을 마주친다. 그리고 곧바로 시선을 돌린다. 이제 '뭘 봐' 가방의 학생과 그것을 본 사람들은 안도한다. 학생은 상대방이 자신을 공부 못한다고 무시하거나 경멸하지 않는다고 믿고, 상대방은 혹시 모르는 '뭘 봐' 가방의 학생으로부터 해코지를 벗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뭘 봐' 가방의 학생에 대한 시선의 길이가 절대로 짧아야 한다. 마주치는 시간이 길면 그들을 경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뭘 봐'의 주인공은 왜 상대방의 아주 짧은 시선에 만족하는가? 상대방은 왜 좀 더 길게 시선을 주지 않는가? 이 같은 현상, 즉 사회적 상호작용의 가장 미묘한 형태를 평생 심도 있게 연구한 학자가 있다. 미국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이다. 그는 자신 저서 'Behavior in Public Places'에서 'civil inattention'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정중한 무관심'이다. 무관심에 정중함이 담겨 있다고? 이해가 쉽지 않다.

밤늦게 좁은 골목에서, 엘리베이터에서, 화장실에서 생면부지의 사람을 만났을 때를 상상해 보자. 서로 절대 시선을 마주치지 않거나 째려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분명 위험과 공포감을 느낄 수 있다. 이때 많은 사람은 살짝 시선을 마주친다. 서로 순간 위협과 공포감이 해소되면서 안도감을 느낀다. '나는 당신에게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습니다'란 의미를 담은 시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절대 오랫동안 응시하지 않는 묵계가 철저하게 지켜진다. 눈길만 교환하는 정도다. 너무 오래 처다봐도 안 되고 의식적으로 외면해도 안 된다.

'정중한 무관심'은 '째려보는 것(staring)'도 아니고, 아예 '무시(無視:nonperson)'하는 것도 아니다. 이 둘 간의 중간이라 보면 맞다. 'inattention'에 'civil'이란 형용사가 붙은 이유다.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만 바라보는 시선 처리법이다. 시선 처리에 나름의 질서와 의례가 있음을 보여 준다.

'뭘 바'는 이 '정중한 무관심'을 요청하는 기호(semiotic)다. 그도 학생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이나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김동우 YTN청주지국장
김동우 YTN청주지국장

이 '정중한 무관심'은 익명성에서 비롯될 수 있는 삭막함과 위협감을 해소할 수 있는 무기다. 시선 마주침과 동시에 이뤄지는 악수가 무장해제의 의미(당신을 해칠 의도가 없습니다)를 담고 있는 것처럼 '정중한 무관심'도 마찬가지다. 오늘부터 엘리베이터에서, 화장실에서 낯선 사람과 살짝 시선을 마주치자. 건강한 사회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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