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대 겸임교수·로컬콘텐츠큐레이터

여름의 숲으로 갔다. 젖은 숲은 자줏빛 일광으로 빛나고 잎새가 바람에 부대끼며 서걱거린다. 숲의 소리에도 날숨과 들숨이 있고 씨줄과 날줄이 있으니 햇살과 바람의 갈래에 스치며 풍경이 된다. 여름의 숲에 들어가면 숲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고요의 숲에서 무수한 소리가 쏟아진다.

그 중 하나가 내 가슴을 때린다. 살아있는 매 순간이 기적이라며,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다며, 살아야 하는 이유라며 무디어진 내 마음의 촉수를 두드린다. 여름의 숲에서 느슨해진 내 마음에 푸른 물감을 칠한다. 어디로 가야할지 머뭇거릴 때 자연은 내게 말없이 길을 안내한다. 그 길을 따라 자박자박 걷는다.

그날의 일은 아직도 내 가슴을 앙가슴 뛰게 한다. 그리운 것은 농촌에 있다고, 농촌이 살아야 지역이 산다고, 하나의 마을은 하나의 박물관이라고 외쳐왔는데 진한 땀방울을 흘리며 만났던 그 마을은 내게 경전처럼 다가왔다. 마을이 콘텐츠이고, 생명이 자본이며, 농촌이 희망임을 묵상했다.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를 들어서자마다 '단구제지'라는 손글씨 간판의 하얀 건물이 마중 나왔다. 발 닿는 곳마다, 눈길 마주하는 풍경마다 오달지고 마뜩하다. 구릿빛 농부의 풍경 구순하다. 까치발을 하고 마을 곳곳을 기웃거리는 내내 숨을 죽였다. 낯선 마을의 풍경이 무디어진 내 가슴을 때리고 있었다.

'단구제지'는 충북도 무형문화재 한지장 황동훈 씨와 마을 주민들이 한지를 뜨던 곳이다. 부친이 1956년 창업한 단구제지를 물려받아 전통한지의 맥을 이어온 황 씨는 순수한 수작업으로만 한지를 만들어 왔다. 종이가 얇고 내구성과 유연성이 뛰어나 전량 일본으로 수출됐다. 책은 물론이고 우주복과 옷으로도 만들어졌다. 한일 갈등의 골이 깊은 가운데 한국 공예와 장인의 우수성을 재확인하는 대목이다.

황동훈 씨는 지난해 봄 운명을 달리했다. 전수조교 하나 남기지 못해 한지공장이 일 년 째 쉬고 있다. 이곳에는 50년 넘는 한지공장의 역사가 오롯이 남아있다. 종이를 삶고 뜨고 건조하던 풍경, 낡고 오래된 물건 하나 하나가 문화유산이다. 이곳은 한지박물관과 근대문화유산으로의 가치가 뛰어나다. 지금 당장이라도 한지를 다시 뜰 수 있는 모든 여건을 갖추고 있고 교육과 체험활동도 가능토록 돼 있다.

한지공장을 지나면 빨래터가 있다. 산속에서 내려온 시원한 물줄기가 세차다. 여름에는 어름처럼 차갑고 겨울에는 온천처럼 따뜻하다. 그 옆에 위치한 적산가옥 한 채. 일제 강점기 때 단양등기소로 사용됐던 건물이 철거되자 주민들이 목재를 이 마을로 가져와 창고를 만들었다. 이 또한 가슴 뜨거운 마을의 보물이다. 원형을 보존하고 다듬으면 마을의 아카이브 공간과 청년창업 콘텐츠로 제 겪이다.

이 마을은 소백산의 계곡물이 흐르는 곳이다. 가마소는 가마솥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계곡의 물이 이곳에 잠시 머물다 간다. 깊고 푸른 풍경과 등골 싸늘한 기운이 가득해 예나 지금이나 마을의 명소로 인기다. 최근에는 소백산 죽령 옛길을 복원했다. 돌담과 골목길 풍경이 애틋하다. 사과와 산나물이 이곳의 특산품이다. 낡고 빛바랜 폐가가 여럿 있지만 잘 다듬으면 훌륭한 농촌호텔이 될 수 있다. 주민들의 정성 담긴 농가맛집도 가능할 것이다.

농촌과 자연에서 펼쳐지는 TV예능프로그램이 인기다. 농촌은 그 자체가 콘텐츠다. 역사와 문화와 생태와 농경이 살아 있는 곳이다. 버릴 게 하나 없다. 당장 보기 흉하고 불편하다고 헐거나 외면하면 안된다. 마을의 풍경과 이야기를 콘텐츠로 만들면 도시에서 구현할 수 없는 값진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우리 고유의 삶과 멋이 오롯이 살아있는 마을을 만들자. 그곳에서 100년 가는 희망을 빚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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