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김동우 YTN 충청본부장

사람들은 돈과 권력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면 어느 것을 택할까? 돈과 권력 가운데 무엇이 먼저일까? 사실 답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하지만 개인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사는 많은 사람은 돈이 권력을 창출하는 것에 무게를 싣는다.

돈은 경제적 권력이다. 돈은 소유할 가치가 있는 객체에 대해 경쟁의 개연성을 지니고, 경제외적인 정치 권력이나 사회적 명성을 얻을 수 있다. 돈의 한자어, '錢(전)'은 '금덩어리 금(金)'과 '쌓을 잔()'으로 구성된다. ''은 여러 개의 '창 과(戈 - 전쟁. 싸움)'를 쌓아 놓은 형상이다. 일금양과(一金兩戈)다.

도대체 '돈'과 '창'이 어떤 관계가 있기에 하나도 아닌 두 개의 '창'을 넣었는가? 또 다른 가치를 창출하고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무한의 가치라서 그 소유과정이나 지속적 보유에 희생이 따르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봄이 맞다. 금은 소중하고 상대적으로 가치 있는 물건이다. 창은 쳐들어오는 이민족 등 적을 물리치기 위한 살상 혹은 위협 도구다. 돈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런 '錢'의 함의(含意)에 따르면, 돈의 획득 또는 보유를 위해서는 물리적 싸움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삶의 방향과 질의 결정 요인이 돈? 맞다. 돈을 얻고 보유하기 위해 창을 겨누는 행위는 목숨까지 걸겠다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제 삶은 돈의 식민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도 돈만큼 삶을 좌우한다. 권력은 타인 또는 조직을 좌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즉 특정인이나 집단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잠재적이고 정당화된 능력을 말한다. 돈이 경제적 권력임에 반해, 이 권력은 정치적 권력이다. 권력행위는 저항에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는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권력 소유는 권력을 행할 상대를 통제할 능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권력은 관계적이며 위계서열 적이다. 권력의 원천은 돈과 정보, 지식 등 자원, 물리적 힘, 명성 등 다양하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원래 권력은 보유가 아닌 분배 의미다. '권(權)'은 '타인을 다스리거나 복종시키는 힘' 이외에 '저울과 저울추, 저울질하다'라는 뜻이 있다. 진(秦)은 통일후 천칭으로 무게를 달 때 쓰는 분동(分銅)을 '權'으로 이름 붙여 사용했다고 한다. 천칭은 질량이 미리 정해진 추와 시료가 균형을 이뤄 무게를 재는 저울이다. 추인 '權'이 균형을 추구하듯 권력의 본질도 균형이다. 권력은 쥐고 마음대로 흔드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게 나눠 주거나 공유하는 사회정치적 에너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권력은 삶의 지배 도구가 된 지 오래다.

이처럼 돈과 권력에 의한 삶의 지배를 논한 학자가 있다. 독일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Harbamas)다. 그는 우선 '체계'와 '생활세계'로 현대사회를 나눈다. 전자는 경제와 관료로써 '체계', 후자는 언어와 문화의 세계로써 '생활세계'다. 이 경제(돈)와 관료(권력) 등의 체계가 언어와 행위능력이 있는 주체들의 상호작용, 의사소통의 '생활세계를 식민지화'한다. 식민지화는 생활세계의 기능 상실과 문화적 빈곤 등의 사회병리 현상을 빚는다. 그는 해결책으로 '이해 지향적 의사소통행위'라는 처방전을 제시했다. 행동지침으로 합리적, 실천적 의사소통을 추동하는 신사회운동을 제안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와 삶의 세계에 금권(金權)이 정박(碇泊)해 있다. 이성과 합리성에 근거한 의사소통이 불통이라는 얘기다. 상호 이해가 아닌 각자나 집단의 목적 지향적 의사소통만이 판치고 있다. 이른바 흑백논리다. 억지 논리와 궤변이 앞서고 담론적 공론은 저 멀리서 헤매고 있다. 과연 이런 나라가 희망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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