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정치와 종교 얘기는 하지 말자

수도 없이 들어온 말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정치나 종교, 사랑, 역사 그 어느 주제로도 갈 수 있는 것 아닌가. 미리 통제하는 자체가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도 저 말은 단골 메뉴로 등장하곤 했다. 많은 친구들이 동의해도 나는 저 말에 담긴 금기 이데올로기를 깨뜨리며 주제의 자유로운 확산을 위해 애썼다고 말할 수 있다. 내 노력이 실패로 끝났다고 할 수 있고 꽤 많은 친구들이 심한 논쟁의 결과 서로 상처를 받고 멀어진 경우도 생겼다. 그런 가능성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대화의 방법론을 조금이라도 익히면 비단길이 될 것이 지옥으로 화하곤 했는데 슬프고 안타까웠다. 방법론은 마음과 통할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엔 저 금기가 통용될 수밖에 없는 뼈저린 역사가 있다. 저러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 무렵에 자기 검열화 되다시피 한 것이 소통의 시대라는 현대까지 장악한다고 볼 수 있다. 어리석고 슬픈 일이다.

우리나라가 심각한 문제들로 들쑤셔진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지만 요즘은 색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한일관계가 일정하던 궤도를 벗어나 극렬한 갈등 속에 있다. 국내 문제들과도 복잡하게 연계되면서 나라 전체가 들썩이며 국민들을 불안케 하고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게 만든다.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의 문제도 혼란의 판을 더 키운다. 안보,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변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상황을 혼란으로 치닫게 하고 있다.

이런 속에서도 정치와 종교 얘기는 하지 말자는 말이 곧잘 나온다. 특히 윗세대에게서. 고통스런 시절에 형성된 관념이 이 시대 역시 그 시대와 동일시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 결과도 한몫 해 우리는 현실의 복잡성에 대해 종합적, 입체적 안목을 지니기가 쉽지 않다. 자신의 생각에 어떤 허점이 도사려 있는지 알아차리기가 좀체로 힘들다. 자기는 맞고 남들은 틀리다. 바람직한 차이 아닌 저급한 판단력이 개인을 지배하고 사회의 공기를 이룬다. 사회를 병들게 하고 질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병폐가 된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각성 및 새로운 안목은 서로 다른 사람들과 서로 다른 이야기를 격의 없이 자유롭게 주고받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상호 개방 속에서 자아를 또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지혜가 터득되어 메타 인지가 생겨난다. 메타 인지가 아주 중요한 시기가 특히 요즘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하게도 그 결여 속에 무엇이 결여되었는지도 대체로 모른채 살고 있다.

흑백논리로 경직되게 나누어지고 피상성과 천박성, 헐뜯기, 자기 이권을 위해 독단으로 치닫기. 한쪽 편에 서면 그 편에서의 잘못에 대해서도 침묵하거나 박수를 쳐주는 부조리가 우리사회에선 끝없이 되풀이된다.

정치 문제를 과감히 얘기하자. 종교 문제는 이 칼럼에서는 논외이지만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무정부주의건 담론에 구애받지 말자. 아담 스미스건 칼 막스건 폴라니건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자. 과감히 이야기하고 빈 마음으로 겸허히 듣자. 자기 색깔로 상대방을 뒤집어 씌우지 말고 그의 색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우리가 이런 사회문화를 일찌감치 만들었다면 현재 시국에 대해 객관적이며 입체적인 통찰력을 지닐 수 있다. 한일 관계는 역사적인 것, 경제적인 것, 아베의 극우적 욕망 등등 복잡한 결과로 어정쩡한 봉합이 뚫리며 터져나온 것이다. 그런 국제 관계와 국내 관계를 통합적인 덩어리로서 인식할 수 있는 사유가 생길 수 있고 생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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