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얼마 전이 동지였다. 12월 22일. 일년 중에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일양시생(一陽始生)이라고 해서 양 하나가 비로소 시작되는 날이라고도 한다. 나는 그 개념을 진즉에 알아왔는데 동짓날하면 음이 거의 대부분이기에 으레 어두울 거라는 관념 속에 있었다. 그날 밖을 돌아다니던 나는 문득 놀랐다. 세상이 어찌나 밝은지. 어둠과는 상관없이 여느 날이나 다름없이 햇볕이 짱짱한 것이다.

동짓날을 그동안 관념적으로만 생각해왔다는 자각 속에 그 기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은 결코 어둡지 않다. 그런데 저것을 보며 어떻게 일양시생이라는 철학적 사유를 끄집어냈을까. 아주 옛날에 말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전자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것에서 후자를, 그것도 원리나 이치로서 밝히는 것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자는 전자를 두툼하게 해주며 그 근원을 해명하는 힘이 있다.

동짓날은 과학적으로는 태양의 황경이 270도 위치에 있는 날이다. 현상적으로는 밤이 가장 길고 철학적으론 일양시생이며 과학적으로도 이처럼 규명된다. 현상과 철학, 과학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우리 일상의 상당수가 표리부동하며 불일치로 돌아가는 것을 볼 때 저러한 일치감을 지닌 동지의 의미는 심오하다. 겨울 역시 음양오행에서 수(水)에 속하며 숫자로는 1이다. 근원적이다. 동지는 겨울의 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겨울은 어떠할까. 한마디로 겨울이 겨울 같지 않다고 보인다. 퓨전화가 일상인 세상이다. 퓨전화의 양면성이 있을 것이다. 겨울 역시 퓨전화되어 겨울다운 맛이 상당히 사라져 있다. 뼛속까지 스미는 추위, 엄동설한 등 겨울의 폭력에서 어느 정도 해방시켜 준 것에 고마운 점도 있다. 그러나 지나치면 안하니만 못하다고 겨울다운 맛을 지나치게 상실한 것이 사실이며 그것이 우리가 사는 문명이고 세계일 것이다.

동지는 고대 사회에선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되는 날로 여겨 태양신에 대한 제사를 지낸 날이기도 하다. 일년 중에 밤이 가장 긴 동짓날이 바로 부활의 날인 것이다. 인류의 무수한 신화와 종교, 시적인 것들은 바로 이러한 점 즉 극단 속에서 빚어지는 빛에 의해 탄생되었다. 고통의 극단 속에 행복이 있다느니 고통 자체가 행복이라느니 하는 말들도 동지에 머금어진 원리와 밀접하다.

이처럼 인류에게 철학의 바탕, 종교성, 상징과 상상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겨울이며 동지이다. 겨울 나무에서 우리는 철학적 사유를 느끼고 겨울 바다에서 시적이며 사색적인 세계에 젖어든다. 그러한 동지는 여름의 시작이기도 하다. 극단 속에 극단이 숨어 있고 극단이 극단을 품고 있는 모습은 기이하며 그 아름다움과 깊이의 끝을 알 수 없게 한다.

현대는 탈(脫)의 시대이기도 하다. 탈역사, 탈엘리트, 탈관료제 등 빈번하게 등장한다. 저 셋만 보면 모두 가치와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탈을 하면 안되는 것들도 있다. 인류의 바탕을 지탱해준 철학에 직접적인 것들을 탈을 하면 안된다. 오히려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한다.

우리의 겨울을 지나치게 탈(脫) 겨울 시키지 말자. 겨울은 다른 계절들의 뿌리이기도 하다. 겨울나무가 모든 잎을 떨어뜨린 숭엄함과 도저함으로 인해 도(道)의 이미지로도 쓰여왔듯이. 겨울이 겨울다울 때 봄, 여름, 가을 그 각 계절들도 계절다울 것이다. 겨울의 가치마저 파괴시키려 벌건 눈 켠 문명의 한복판에서 겨울의 가치는 문명의 지속을 위해서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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