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전원 충북인실련 상임대표

현충일을 맞아 국립현충원에 모셔진 둘째 형님을 뵈러 혼잡을 피해 월요일 새벽에 출발했는데도 출근시간과 겹치자 한참을 기다려 입장할 수 있었다. 비석은 새들의 분비물과 먼지로 뒤덮였고, 글씨는 퇴색되어 이름도 잘 보이질 않는다. 그래도 뒷면의 '1951년 10월 25일 순직'은 희미하지만 알아볼 수는 있었다.

준비한 물과 행주로 비석을 닦는다. 한참을 닦아야 자국이 지워진다. 물을 부어 오물을 씻어 내니 비석에 새겨진 형님의 이름이 선명하다. 동구 밖에 모여 무운장구(武運長久)의 어깨띠를 하고 만세를 부르며 떠나가던 작은 형의 늠름한 모습이 물먹은 말간 비석면에 비친다.

꼭 70년 전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눈시울이 뜨끈하더니 눈물이 핑 돈다. 1·4후퇴의 겨울피난길에서 돌아와 숨 돌릴 새도 없이 소집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했다. '작은 성(兄), 지금가면 언제 와?/한참 있어야 될 거야/추석에는 와?/그럼, 그땐 오지. 공부 잘하고 있어' 그게 마지막이었다. 처음이자 끝 소식은 추석 때 온 전사통지서였고, 유해는 추수 후에 도착했다.

비석 앞에 헌화하고 기도를 드린다. 나는 형수님과 함께 막걸리 잔을 올리고 절을 하는데 구순의 형수님이 목을 놓는다. 맺힌 한이 사설도 없이 줄줄 풀려나온다. 통곡을 듣자 함께한 가족들이 눈물을 훔치는데 마른 줄로만 알았던 내 얼굴에도 줄이 간다.

산소 몇 자리 건너서도 통곡이 이어지고, 건너편 구역에선 봉안 후 처음인지 곡성이 길었다. 이런 분위기는 올해가 처음인 것 같다. 음복할 분위기가 아니어서 철상을 하고,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형님께 추석 때 다시 보자고 약속을 한다.

사병묘역의 맨 끝에 마스크를 쓴 여학생들이 흩어져서 비석을 닦고 있다. 대면수업이 없는 날에 봉사활동을 한다고 한다. 인솔자, 지시하는 사람도 없다. 청소하는 학생에게 물으니 친구 삼촌이 연평 해전에서 돌아가셨는데, 추도하러 왔다가 비석의 먼지를 닦는 중이란다.

참 좋은 일 한다고 격려를 하고서 차를 돌려 형님 산소로 다시 왔다. 주변에 닦지 않은 비석과 제단을 찾아 가족이 흩어져서 청소를 했다. 아침인데도 땀이 흐른다. 아침을 거른 탓인지 한 구역의 절반도 못해서 출출하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서 피로한 줄도 몰랐는데,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 정리를 하고 구내식당을 찾았다.

거기서 정말로 우연히 사병묘역 마지막 구역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그 학생들을 다시 만났다. 온통 땀으로 젖어 있다. 또 한 번 칭찬을 해주고, 고생했다면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안겨주었다. 우리 가족들과 함께 나누는 땀 흘린 다음의 아이스크림 효과는 기가 막힐 정도다.

김전원 충북민실련 상임대표
김전원 충북인실련 상임대표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이런 게 행복인가? 땀 흘린 후에 느낄 수 있는 쾌감이리라.

할아버지가 손자한테도 배울 게 있다고 한다. 송구스럽게도 내가 꼭 그 짝이 되었다. 국립묘지에 성묘(省墓)를 왔다가 자기 조상 산소만 살펴보고 가는 것이 통례인데, 그곳에 모셔진 분들은 다 국가발전에 헌신한 분들이므로 형편이 되면 내남없이 보살펴야 마땅함을 그땐 왜 몰랐을까!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