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강대영 농협충북본부 농촌지원단장

잎이 지고 가지만 앙상히 남은 나무를 '나목(裸木)'이라고 한다. 예쁜 꽃이 피고 파릇한 잎이 무성한 나무는 아름답지만, 그 꽃이 지고 잎이 떨어지면 볼품이 없어진다. 하지만 오랜 세월 갖은 풍파를 견디며 조금씩 자라서 큰 고목이 된 나목에서는 신비함과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무수한 고난의 세월을 견디며 상처가 낫다 아물기를 반복하며 울퉁불퉁 해져버린 껍질과 부러지고 갈라지고 기이하게 자란 줄기와 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웬지 경건한 마음까지 든다. 잎사귀로 가리지 않은 볼품없는 속살이지만 숨김없이 보여주는 솔직함이 좋고, 하얀 눈이 가지마다 쌓이면 마치 흰 옷을 입은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신비감에 빠져들곤 한다. 어느 시인은 이런 '나목(裸木)'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을 "나력(裸力)"이라고 했다.

시골마을 어귀에는 몇백년 된 고목이 수문장같이 서 있는 곳이 많이 있다. 내가 자란 시골 동네에도 마을을 지키는 느티나무 고목 한그루가 있었다. 이 고목을 베거나 훼손하면 목숨을 잃거나 불행한 일을 당한다며 마을 어르신들은 이 나무를 신성시 했다. 또 어느 마을의 당산나무에 소원을 비는 쪽지가 수도 없이 새끼줄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모두가 수호신이 보호해 주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신비한 나력일런지도 모른다.

또한 산속 깊은 아담한 절이나 오래된 유명 사찰에는 한두 그루의 고목이 항상 있다. 부안 내소사 입구에 사천왕을 닮은 700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고, 대웅전 앞에는 관음보살 모습의 천년된 고목이 불당에 들기 전 숙연한 마음을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양수리 수종사에는 세조 임금님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가지가 층층이 탑을 쌓은 것 같고, 북한산 흥국사 뒤쪽의 회화나무는 기도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렇듯 고목은 서 있는 장소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또 다른 나력을 발산하는 지도 모른다.

우리가 젊고 활력이 넘칠 때 직장이나 조직에서 직위나 권한을 가지면 권력이 나오고, 아울러 돈이 많으면 재력을 갖는다. 반면 늙고 힘이 모두 빠지고 권력도, 재력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도 나오는 힘이 있다면 그것을 '인간의 나력(裸力)'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권력을 가졌던 정치인이 은퇴한 뒤에도 국민의 존경을 받는 다든지, 재력을 가진 사업가가 그만둔 뒤에도 사회적으로 신망이 높다든지, 평범한 사람이 직장을 퇴직하고 후배들이나 주변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받는 다면 이는 '나력(裸力)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고목의 나력을 가진 훌륭한 상사, 동료, 선배들을 많이 만났다. 그 가운데 유독 한 분이 떠오른다. 30여년이 넘게 직장생활을 하다 정년퇴직 한지 올해로 10년째 접어 들고 있는 이 분은, 말단사원으로 입사하여 성실성과 탁월한 경영능력 등 다방면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직원 최고 직위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지만, 오히려 직원들에게는 더 낮은 자세로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무엇보다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많은 후배들이 이 선배님을 찾아 만남을 이어 오고 있다. 이제 평범한 노인이 되어 다소 마른 모습이지만, 선배 다운 당당한 자세와 겸손한 인품에서 우러 나오는 나력은 감출 수가 없나보다.

그럼, 나에게도 나력이 있을까? 반문해 본다. 직장에서 사업목표 달성이라는 명분으로 후배들에게 갑질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성공에만 몰두한 나머지 가족을 잊고 산건 아닌지? 진정으로 내게 소중한 것들이 무엇 인지도 모르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을 합리화하며 그것이 진실이라 믿고 살아온 건 아닌지? 갑자기 가슴 한켠이 애려온다. 직장생활 30년이 넘었는데~ 인생살이 50년이 넘었는데~ 되돌리지 못할 시간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다.

이제 퇴직이 몇 년 남지 않았다. 그냥 생각없이 늙어 가는 노인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노인은 그냥 나이만 먹는 늙은이고, 어르신은 늘 젊어 지려고 스스로 노력하고 아름답게 익어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노인은 아집이 많고 매사 부정적이며 간섭이 많고 대접만 받으려고 하지만, 어르신은 아량이 많고 매사 긍정적이며 베풀기를 좋아하고 겸손하며 스스로 절제하여 넉넉하게 살아간다고 한다. 어르신으로 주위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면 나력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강대영 농협충북본부 농촌지원단장
강대영 농협충북본부 농촌지원단장

몇 년 후 직장을 떠나 후회하지 않으려면 이제부터라도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 존경받는 어르신 닮는 연습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석가모니께서는 오백생(生)을 닦아서 만인이 존경하는 부처님이 되셨다는데, 저는 몇 생을 더 수양해야 나력이 나오는 고목같은 어르신으로 익어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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