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식물의 세계는 늘 경외스러웠다. 그와 무관한 직업들을 전전했고 도시에 살다보니 접할 기회가 적어 아쉬움이 컸다. 소로리 마을에서 논밭에 벼와 작물들을 협업으로 심고 키우는 사이 결핍된 것들이 조금씩이나마 채워져갔다.

식물은 제 몸을 단 한번도 만지기를 포기한 존재이다. 불현듯 그 생각이 지나갔다. 당연한 말이어서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있겠다. 그러나 단순한 저 사실이 왠지 내 마음의 소매를 끌고 있다. 천지불인이라는 말이 있듯 자연은 광폭하고 냉혹한 면을 지닌다. 음양오행이나 주역의 64괘가 도출되고 성리학의 근본에 해당되는 리(理)나 기(氣), 이치, 진리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바탕에 깔텐데도 그렇다.

사고로 뇌가 망실된 뇌과학자의 강연을 유튜브로 들은 적이 있다. 뇌라는 고급 필터가 망가진 상태에서의 우주가 무시무시한 카오스로 묘사되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생명체의 탄생은 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쫒고 쫒기는 잔혹과 공포를 그나마 견딜 푸른 등불같은 성애조차 아예 허공에 반납한 것이 식물이다. 그런 생각이 이어 흘렀다. 실제로 쫒고 쫒김은 동물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식물과 달리 동물은 늘 먹이를 쫒고 포식자에게 쫒긴다. 처절한 삶의 조건이다. 성애에서 죽음마저 넘어설 쾌감이 느껴짐은 본능적이 아니라 진화의 결과라고 말하는 책도 있다. 살벌한 자연 상태에서 동물이 성애에서 그 정도의 강도를 느끼도록 진화되지 못했다면 포식자가 달려올 때 성애 도중 도망가기 바빠서 종족 보존이 어렵다는 것이다.

본능이든 진화든 학문이 밝혀야 할 성격이지만 동물은 쫒고 쫒기는 절박 속에서 그에 버금가는 쾌감의 기제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식물의 세계는 알 길이 없다. 그런 차원의 기제가 없으려니 하는 편견에 내 말이 기반될 수도 있다.

나는 방에서 거실로 나가 화분에 키우는 난초 가까이 갔다.

선택 당하고 선택한 식물의 길을 그 앞에 서서 생각해보다가 내 손으로 내 얼굴을 만져본다.

손으로 얼굴을 만지는 것. 이 단순한 행위도 단순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다윈에 의하면 동물과 식물로 분화되기 이전에 공통 조상이 있었다. 그것에서 동물과 식물로 분화된 것이다. 그 말이 맞다고 친다면 식물은 동물과 전혀 다른 길을 간 것이다. 조건으로서의 자연 상태는 같다. 식물로서 본다면 동물이 가지 않은 길을 간 것이다. 동물로서 본다면 식물이 가지 않은 길을 간 것이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손으로 얼굴을 만지는 것. 그것은 또다른 생명체인 식물로서는 포기한 차원이다. 삶의 기반인 자연은 끔찍하다. 그러기에 손으로 얼굴을 만지는 행위는 끔찍한 상태에서 도박 같은 선택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미래를 몽땅 걸어야 하는 살떨림 속에서 나온 기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평생 단 한 번도 제 몸 만지기를 포기한 또다른 도박사의 후예인 나무 앞에서 나는 내 얼굴을 만지며 색다른 감회에 젖어갔다.

식물이 택한 길이 돌연 무섭다. 식물의 길과 동물의 길은 전혀 다르다. 지구는 적어도 이 두 개의 길들을 아우른다. 지구가 알면 알수록 미지이기도 한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우리 인간은 미지를 범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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