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해준 공주대 명예교수

2021년은 무령왕릉 발굴 50년, 무령왕이 '갱위강국'을 선포한 1500년이 되는 해이다.

공주시는 이를 기리는 '무령왕의 해'를 선포하고 올해에 무령왕 추모제례,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축전, 무령왕 동상 건립, 2021 대백제전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통해 문화도시의 상징성과 자긍심을 드높기로 한다.

공주, '웅진(熊津)'은 한성, 사비와 함께 백제의 3왕도 중 하나이다. 서기 475년부터 538년까지 64년간의 짧은 기간, 그것도 혼란 중에 임시로 자리한 왕도로 알려졌던 웅진. 그러나 백제왕도 웅진의 위상을 180도 반전시킨 것이 바로 1971년 무령왕릉의 발굴이었고, 이후 공주는 백제역사, 문화의 핵심 공간이자 상징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무령왕은 '백제 왕도' 공주의 역사와 문화를 세상에 크게 알린 특별한 인물이었다.

공주는 비록 60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백제의 왕도가 있었던 곳이지만, 세계유산 무령왕릉과 공산성, 그리고 금강과 곰나루의 전설에 백제의 혼들이 아직껏 꿈틀거리며 살아 있는 곳이다.

웅진에 천도한 백제는 초기에 적지 않은 혼란을 겪지만 동성왕대에 이르러 점차 혼란의 극복과 안정을 도모하면서 국가 중흥의 기틀이 마련되고, 뒤이어 등장한 무령왕 대에는 정치적 안정과 함께 국력 증진을 이루었다.

1500년 전인 521년 무령왕은 사신을 중국 양나라 무제에게 국서를 전하는데, 이 백제의 국서에는 백제가 '여러 번 고구려를 격파하여,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바로 웅진의 무령왕은 백제의 '갱위강국(更爲强國)'을 만천하에 선포한 것이다.

이 갱위강국의 선언이야말로 백제 중흥의 선언이었으며, 무령왕은 일찍부터 꾸어왔던 그 꿈을 즉위 20여 년 만에 이루어냈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50년 전인 1971년 7월 세상을 놀라게 한 무령왕릉 발굴은 백제역사와 문화의 수준과 가치를 세상에 알려주었다.

무령왕릉에서는 삼국시대에 유례가 없는 특별한 무령왕의 지석과 함께 왕과 왕비의 금제관식을 비롯한 각종 장신구, 생활용구, 의기 등 108종 2천900여 점의 유물이 1500년 세월을 뛰어 넘어 빛을 보았다.

이해준 공주대 명예교수
이해준 공주대 명예교수

이들 무령왕릉 출토 유물은 12건이 국보로 지정될 정도로 백제문화가 지녔던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게 하고, 백제문화의 국제성을 보여준다.

무령왕으로부터 1500여 년이 지난 오늘, 공주는 또 다른 백제의 꿈을 가지고 있다. 백제역사문화 콘텐츠를 활용하여 백제의 문화와 정신을 새롭게 부활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무령왕이 꾸었던 '갱위강국'의 백제 꿈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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