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김동우 전 YTN충청본부장

한 고조 유방이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하는 데는 한초삼걸(장량, 한신, 소하)의 힘이 컸다. 이 가운데에서도 통일의 견인차 구실을 했던 참모는 한신이었다. 초패왕 항우를 사면초가에 빠트려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한신의 성장 과정은 보잘것없다. 어머니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할 정도였고 남의 집에 얹혀사는 등 빈한하기가 그지없었다. 하지만 꿈은 원대했다. "나는 천하의 명장이 될 것이다"하며 늘 큰 칼을 차고 다녔다. 마치 협객처럼 말이다. 이른바 '폼생폼사(Form生Form死)'였다. 주변 사람들은 늘 비웃고 손가락질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이런 행위를 보다 못한 저잣거리 건달이 시비를 걸어왔다. "어이, 한신, 칼을 차고 다니는데 그것 개폼 아냐?. 나하고 한판 붙자." 한신은 "오늘은 바쁜 일이 있어 다음에 붙자"며 가던 길을 가려 했다. 건달은 길을 막고 "아 그래, 그렇다면 용기 있으면 나를 그 칼로 찌르고 가시지? 아니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 보시던지?" 한신은 잔머리 굴리는 데 찰나(1/75초)를 소비하지 않았다. "여기서 건달을 죽이면 모든 꿈이 수포가 되는데 어찌하랴. 대세 도모를 위해 여기서 참아야 한다." 즉시 가랑이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건달은 물론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은 수모를 말해 무엇하랴.

한신은 기꺼이 수모를 참았다. 결국 한초삼걸이 되어 한나라 통일의 주역이 되었고 천하 명장의 꿈을 이뤘다. 더욱이 자신을 욕보인 건달을 장교로 임명했다. 가랑이 밑을 기어 간 것은 작전상 일 보 후퇴였음을 보여줬다. 과하지욕(跨下之辱)의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가랑이 밑의 치욕'이다. 한신이 치욕을 참지 못했으면 한나라 통일에 수훈 갑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몸이 가늘고 원통형으로 생긴 자벌레는 전진하는 모습이 참 특이하다. 꽁무니를 머리 쪽으로 끌어당겨 움츠렸다가 몸을 길게 늘이는 동작을 반복해 앞으로 나아간다. 몸통의 많은 부분을 위쪽으로 구부리지 않으면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척확지굴 이구신야(尺之屈 以求信也)'다.(주역:계사 하편) 자벌레가 몸을 구부리는 것은 다시 펴기 위함이다. 이는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재의 굴욕이나 고통을 참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긴 비유적 언표(言表)다. 하찮은 곤충 하나가 주는 메시지가 참으로 위대하다.

여황제 측천무후가 중국 당나라를 지배할 때였다. 신하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시기 질투, 중상모략 등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 가운데 누사덕 형제가 있었다.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는 누사덕은 자사(刺史;지방 관직)로 부임하려는 동생을 일부러 만나 은밀한 대화를 가졌다.

"황제의 총애에는 다른 신하들의 시샘이 반드시 따른다. 이럴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라고 누사덕이 물었다. 동생은 "다른 신하가 제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화를 내거나 상관하지 않고 잠자코 닦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누사덕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네가 화를 내거나 상관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침을 닦는다면 분명 침을 뱉은 신하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다. 그러니 침을 닦으면 안 되느니라. 침은 시간이 지나면 마르니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제일이니라."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나오는 이야기로 '타면자건(唾面自乾)'이란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다른 사람이 내 얼굴에 뱉은 침은 자연히 마른다.' 굴욕에 대한 인내의 모범적 사례 가운데 하나다. 굴욕에 대한 인내는 처세술이다. 굴욕의 상황을 꿰뚫어 보는 안목과 식견이기도 하다. 굴욕에 대한 인내는 비굴과 같음이 아니다. 비굴의 영토에서 벗어나 미래에 확실하게 담보된 보상이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전 YTN충청본부장

굴욕을 참기는 쉽지 않다. 사람 행동에는 이성보다 감정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을 인(忍)을 세 번 새기면 참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한다. '忍'을 풀어보면 '마음 심(心)' 위에 '칼날 인(刃)'을 세워 놓은 형상이다. 이런 형상도 능히 참을 정도라면 어떤 굴욕인들 못 참겠는가?

한신이 한초삼걸이 되고 자벌레가 전진하고 누사덕 형제가 무난한 관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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