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현 칼럼] 한기현 논설고문

"모든 분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정진석 니콜라이 추기경이 선종 직전에 남긴 마지막 말이다.

2006년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두 번 째 한국인 추기경으로 서임된 정 추기경이 지난 27일 노환으로 선종했다. 지난 2월 21일 심한 통증으로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한 뒤 한 때 병세가 호전됐지만 입원 두 달여 만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90세.

1961년 사제 서품에 이어 1970년 국내 최연소인 만 39세에 주교 서품을 받은 정 추기경은 충북 청주와 인연이 깊다. 1970~1998년까지 2대 청주교구장으로 28년간 교구를 이끈 그는 재임 시절 삶의 모토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준다'는 '옴니버스 옴니아(Omnibus Omnia)'로 정하고 철저하게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죽은 뒤에도 어머니에 이어 각막을 기증했다.

청주교구에 따르면 정 추기경은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켜지 않고 지내고 바지 한 벌로 18년을 지내는 등 청빈하게 살았다. 가정 형편으로 식사를 초대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교구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1999년에는 "생활비에 보태쓰라"며 40년간 신자들이 내놓은 돈 5억 원을 어머니가 잠든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학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앞서 1996년에는 돌아가신 어머니 유산 중 일부로 증평군 증평읍 초중리 땅을 구입해 초중성당을 건립하고 본당 이름을 모친 세례명인 '성녀 루시아'로 지었다. 사회사업 분야에서는 꽃동네 설립(1982년)과 자모원, 양업고등학교, 청주성모병원, 충주맹아·농아학교 지원 등 지역사회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실천했다.

1931년 친가와 외가 모두 4대째 독실한 천주교 신자 집안에서 태어난 정 추기경은 열 살 때부터 외가 근처인 명동성당에서 복사(미사 등 천주교 예식보조)로 활동했다. 어릴적 꿈은 사제가 아니라 발명가였다. 그래서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 재학 중 한국전쟁이 터지자 국민방위군에 소집돼 장교로 복무하면서 겪은 전쟁 참상이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정 추기경은 생전 인터뷰에서 "전쟁 당시 뒤따르던 부대원들이 강 얼음이 깨져 물에 빠져 죽고 코 앞에서 지뢰가 폭발해 피를 흘리며 죽은 전우들을 수없이 보면서 '내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라 단지 덤일 뿐'이라는 현실을 절감하고 '전쟁 기간 내 삶의 뜻을 깨닫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고 말했다.

그는 "덤으로 사는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은 '남을 위해 사는 삶'이라고 생각해 전쟁 후 신학교에 입학해 30세에 천주교 사제가 됐다"고 사제의 길을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한기현 국장겸 진천·증평주재
한기현 논설고문

젊은이들에게는 "나만을 위해 살지 말고 민족을 위해, 더 크게는 우리 인류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큰 인물이 되도록 노력하세요. 그리고 실력을 키워야 인생이 보람 있고 풍부한 삶이 될 수 있으며 개인을 위해 살지 말고, 많은 사람의 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평생 남을 위해 살고 모든 것을 다 주고 떠난 정 추기경의 삶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평생 교훈이 되길 바란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