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햇살을 되비추는 사철나무 연녹색 잎사귀는 더욱 찬란하다. 산책길에 사철나무로 이루어진 초등학교 담장은 싱그러움이 가득하다. 인적이 많지 않아 가끔은 걸음을 멈추고 잎들을 들여다본다. 전혀 지루하지 않다. 볼수록 신선하고 어떤 어휘로도 제대로 묘사할 수 없다. 생기가 솟구친다. 늘 푸른 나무지만 이맘때 느낌이 가장 좋다.

햇살 가득한 사철나무 잎사귀의 고혹적인 빛깔을 마주하니 몇 년 세월을 함께 한 이가 생각난다. 영원한 청년 같은 사람이다. 처음 만난 건 조금 엉뚱하게 영어 세미나 모임이었다. 건축 일을 한다고 소개 받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흔히 '노가다'라 부르는 막노동이었다. 그렇게 살면서도 영어가 좋아 그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우연히 숙소가 같아 며칠 지내며 답답해하는 몇 가지를 설명해 주었더니 어느 날 우리 집 주변으로 이사를 왔다. 내게 영어를 배우겠단다.

짧은 기간 함께 해 보니 기초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도전정신이 가득해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이면 가리지 않고 참여했다. 일터에서도 영어암기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렇다고 일에 꾀를 부리는 게 아니어서 주변에서 성실함을 인정받고 있었다.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그분은 한글로 토를 달아 억양과 관계없이 성경구절을 암기하고 있었다. 한 구절을 수천 번 읽고 외우고 잊어버리기를 되풀이해서 수백 구절을 외우고 있다고 했다.

어떤 이의 충고를 들었는지 야간신학에 편입해 두 학기했던 신학공부를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하나님의 일에는 소명이 가장 중요하고 다음이 열심이니 말릴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분과 유사한 목회자가 이끄는 영어 세미나를 다녀와서 자신은 그곳에 더 맞는 것 같다며 이사를 했다.

돈키호테 같은 두 분이 만났으니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목사 되고 선교사 임명을 받아 필리핀에 파송되었다. 그곳에서 대여섯 해 선교사 일을 하셨을 게다. 필리핀 사람들이 원체 낙천적인데다, 놀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해 나름 사역을 감당했다고 한다. 아마도 설교에 어려움이 많았을 테지만 외우는 구절이 많아 상황과는 맞지 않아도 그냥저냥 넘어 간 것 같다.

많은 시간과 재력을 들인 그 분보다 아내 되는 분이 의사소통이나 읽는 것에 더 빨랐다고 한다. 그분은 용기와 도전정신으로 교회를 세우고 실생활로 주님의 사랑을 전파하다, 육체적 한계를 느껴 사역을 마무리하고 귀국했지만 아직도 순수한 열정이 식지 않았음을 본다. 마른 체구에 훌쭉한 얼굴로 만년 청년 같았던 분이 이제 칠십대 중반을 넘고 있다. 그분을 뵈면 푸른 나무가 연상되고 싱싱함이 느껴진다. 사철나무 잎사귀에서 그분을 연상하다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더 노인 같다. 다소 무모할지라도 내게 도전정신과 과감한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상념을 떨쳐내고 다시 사철나무 잎사귀를 본다. 여전히 햇살을 튕겨내는 연 녹색이 눈부시다. 하늘 푸르고 대기 포근해 산책하기에 더 없이 좋은 날이다. 사철나무 잎사귀에 그분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내리쬐는 햇볕이 생각보다 따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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