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석민 충북법무사회장

진(秦) 이세황제 때, 환관 조고가 황제에게 말한다. "황제가 존귀한 까닭은 신하들은 소리만 들을 뿐 얼굴을 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황제를 짐(朕)이라 합니다." 즉 황제는 업무에서 손을 떼라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조고는 사슴을 끌고 와 황제에게 이게 말이라고 강변하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를 남겼고 그렇게 진나라는 망한다. 이렇게 신하가 왕을 속이고 조롱하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니 대표 사례가 '아파트 위탁관리'이다.

몇 달 전 모 아파트 입주자 대표 회장이 누렇게 뜬 얼굴로 서류 보따리 들고 왔다. 보따리를 풀어 보니 아파트 위탁관리를 맡은 회사가 관리를 엉망으로 하여 해지를 하였는데 오히려 계약유효확인 소송을 걸어온 경우로 시청 앞에서 법무사를 한 지 14년 만에 처음 보는 사건이었다.

이런 경우 위탁관리사는 돈도 인력도 경험 있는 프로(pro)여서 갑(甲)이 되고, '괜한 일 만들어 시끄럽게 한 입주자'는 백기를 들거나, 주민들 간의 다툼으로 불길이 번지므로 입주자들은 철저히 을(乙)이 된다.

그런데 이 소송 전에는 입주자가 위탁관리사에 갑 또는 대등한 지위였을까? 그렇지 않다. 입주자들은 위탁관리사에게 관리를 맡기고 짐(朕)이 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입주자는 대표회의를 통해 서류상 갑(甲)이 될 뿐이며 기존부터 입주자는 을(乙) 이었다.

기존부터 을이었던 증거가 보따리를 풀어보니 나왔다. △ 사업자선정 위반 △ 정보 미공개 △ 입찰 무효대상의 선정 △ 계약이행보조금 미 수령 등 이 정도면 당연히 입주자가 이기겠지 하는 기대를 한다. 그러나 프로가 괜히 프로인가! 아마추어는 실체를 논하지만 프로는 절차도 따진다. 역시 위탁관리사는 해지의 절차 문제를 집중 공략하였고 입주자 회장은 패소(敗訴)의 불안감에 시달렸다.

"차분히 무겁게 대응하시라!" 말과 함께 진행한 소송이 얼마 전 판결이 났다. 물론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의 승소이다. 승소를 떠나 위탁 선정의 문제를 살펴보면 입주자 대표회의가 출범하기 이전에 위탁관리사의 최초 선정에 건설사 또는 입주 예정자 카페라는 단체가 입김을 불어 넣어 불투명·불공정하게 시작하고 잘못된 첫 단추에서 다시 관리부실이 파생되고 입주자는 을의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 과정을 밟고 있다.

역시 위 소송에서도 입주 이전에 선정된 위탁관리사는 청주시 감사 결과 공동주택관리법 위반 13건, 규약 위반 3건, 기타 2건의 부실 업무가 있었다. 앞으로 지자체와 지방의회는 위탁관리사의 선정과 관리에 있어 입주자에게 유리하고 공정한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며, 정체모를 입주 예정자 카페의 횡포에 대한 규제와 함께 돈(중도금)을 내고도 입주 하기 위해 건설사의 눈치를 보는 현재의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김석민 충북법무사회 회장<br>
김석민 충북법무사회 회장

또한 '공동주택관리법'에 따르면 지자체장은 감사 요청이 없어도 공동주택을 감사할 수 있다. 위 소송 결과로 매년 몇 군데의 아파트라도 업무 감사를 하여 관리의 중심을 입주자에게 돌려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공자는 "천하에 도리가 살아 있다면 예악과 정벌은 왕으로부터 나오고 가신이 명(命)을 잡으면 삼대 안에 망한다."고 말한다. 나라 정치든 아파트 관리이든 힘의 원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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