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김영식

요즘 '윤며들다'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이 말은 얼마 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윤여정을 두고 MZ세대 젊은이들이 '윤여정에게 스며든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1947년생 원로 여배우에게 우리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내가 아는 그녀는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특출 나게 예쁜 외모를 가진 배우가 아니다. 잘나가는 여타 여배우들처럼 화려한 여주인공 역할을 맡아 주목을 받은 것도 아니다. 내게는 그저 주말 드라마의 조연으로 출연했던 연기를 꽤 잘하는 나이 많은 여배우였다. 일흔의 나이를 넘긴 경력 56년차 그런 여배우에게 내가 '윤며들고' 있는 건 왜일까?

'윤며들기' 시작한 나에게 그녀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윤여정 배우는 1966년 TBC 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1970년대 초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인기를 한 몸에 받았지만, 1974년 미국행을 선택하면서 오랜 기간 공백기를 가졌다. 낯선 이국땅에서 결혼 후 13년 만에 이혼을 했고, 홀로 두 아들을 양육하기 위해 연예계에 복귀해 TV 드라마에서 크고 작은 역할을 가리지 않고 연기하면서 '생계형 배우'가 됐다.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지금의 그녀를 생각하면 '생계형'이라는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은 '생계형 배우' 윤여정을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70년대 초반 인기를 누렸다지만 13년간의 공백기 동안 평범한 주부로 살아 온 그녀가 어떻게 영화 '미나리'의 순자 역으로 제93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을 비롯하여 각종 시상식에서 40여 개의 연기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원동력은 "열등의식"이라고 대답했다. 연기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연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열심히 대사를 외우며 남한테 피해를 주지 말자는 게 배우 윤여정의 출발점이었고, 나중에는 편안하게 좋아서 하는 연기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절실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 대본이 성경 같았다고 한다. 동기야 어떻든 연기를 위한 노력, '연습(Practice)'이 그녀를 오스카로 가는 길로 안내했다.

'생계형 배우'라는 말은 배역을 따지지 않고 돈만 되면 뭐든지 하는 연기자라고 다소 비하적인 의미로 이야기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는 배역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연기라면 무엇이든 도전하는 배우라는 의미로도 이야기 할 수 있다. 1966년 데뷔 이후 55년 동안 90편이 넘는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한 그녀, 60살 까지는 '생계형 배우'로 하기 싫은 일도 많이 했지만 61살부터는 내가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하고만 일해야겠다는 '사치형 배우'로 산다며 특유의 입담을 보여준다. '생계형 배우'이든 '사치형 배우'이든 그녀에겐 배역의 크고 작음이 중요하지 않다. 남에게 민폐 끼치지 않기 위해 그냥 많이 노력하며 맡은 배역을 해내는 '열등의식'으로 가득 찬 대(大)배우가 그녀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40대인 나는 가끔 70대에는 무엇을 하고 살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한번도 70대에 무언가 새로운 도전을 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적은 없다. 그저 70대까지 살아는 있을는지 하는 생각에 인생의 조급함만 키워왔다. 나를 포함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30-40대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키우고 직장생활 열심히 하면서 돈을 벌고, 50-60대에는 자식들 출가시키고 퇴직 후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삶의 방정식을 푸느라 늘 조바심으로 살고 있다. 나에게 70대란 그냥 덤으로 사는 인생 또는 죽음을 기다리는 인생이라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그녀의 말처럼 40대에 불과한 나는 "낡고 매너리즘에 빠졌고 편견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진다. 고작 40여년을 살아온 경험 때문에 이렇게 오염되었다고 생각하니 '멈추지 않는 도전 정신'을 보여준 70대 작고 왜소한 여배우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김영식 서원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김영식 서원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오스카 탔다고 윤여정이 김여정 되는 건 아니다"라며 민폐 되지 않을 때까지 연기하다가 죽으면 좋겠다는 배우 윤여정을 보면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본다. 우리나라는 이미 고령화 비율이 16%가 넘고, 2025년에는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다. 벌써부터 고령 인구로 인한 사회적 부담을 걱정하고 나중에 고령인구가 젊은이들에게 민폐가 될 거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고 있다. 배우 윤여정은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들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20대의 나의 제자들과 40대인 나 그리고 70대인 배우 윤여정은 모두 하루하루를 처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비게이션을 켜고 브로드웨이(Broadway)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전과 노력이라는 '연습(Practice)'으로 그곳에 설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윤여정을 보면서 나도 오늘은 세계 속 대한민국 대표 배우가 된 그녀에게 '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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