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옥 수필가

행운목꽃이 피었다. 천정에 닿을 정도로 키가 자란 행운목이 하얀색 꽃덩어리로 향기를 내뿜고 있다.

우리집에서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이 십여 년은 되고 그 이전부터도 살았을 테니 행운목의 나이는 잘 모른다. 행운목은 잎만 보는 나무인 줄 알았지 이렇게 꽃도 피운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처음 보는 꽃도 신기했지만 그 향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진했다. 오랜 세월 동안 제 몸 속에 축적해 둔 정성과 사랑을 한꺼번에 쏟아 내는 양 행운목꽃은 절절하게 그 목숨의 향기로 숨쉬고 있는 중이다.

한동안 우리 가족은 행운목이 뿜어내는 달콤한 향기 속에서 살았다. 외출했다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벼웠고 집안의 모든 문제거리가 일시에 사라져버릴 것 같은 기대감은 우리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문제는 그다음 생겨났다. 처음엔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다는 꽃에 대한 신기함과 대견함 때문에 함께 기뻐했던 가족이 행운목의 개화에 또 다른 기대를 걸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꽃이 이름 그대로 우리집에 정말 '행운'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고 흥분한 우리는 로또 복권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다 모이는 밤이면 머리를 맞대고 번호 매긴 탁구공이 등장하는가 하면 꿈속에서 들었다는 숫자 이야기까지 동원된 갖가지 방법으로 로또 번호를 조합하기에 바빴다.

그렇게 한 달여의 시간이 흐르고 우리 집에는 아무런 행운도 생겨나지 않은 채 행운목 꽃도 점차 그 향기를 바래며 시들어 갔다.

행운목과 함께 오래된 화분 하나가 있다. 정확한 행운목의 나이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이 화초의 정확한 나이 또한 모른다. 잎이 나선형으로 길고 뽀족한 잎이 축축 늘어지면서 무성해서 난의 일종이 아닐까 생각해볼 뿐 미안하게도 이름을 모른다. 이름 한 번 불러 주는 일 없는 주인의 무심함 속에서도 얼마 전에 이 식물 또한 우리 집에서 파란을 일으켰다. 연두빛이긴 한데 새잎은 아닌 듯한 새로운 줄기 같은 것이 올라오더니 그 줄기 끝에서 하얀 꽃들이 주르룩, 마치 은방울꽃들처럼 줄을 지어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하루 몇 대씩의 꽃대가 올라오고 열 대가 넘는 꽃줄기들이 무성한 잎 틈새로 올라와 다투어 줄기마다 꽃들을 피워냈다.

창을 통해 종일 들어오는 밝고 찬란한 햇빛, 우리가족이 숨 쉬는 공기, 무심한 듯 가끔씩 부어주는 물줄기 한 방울도 이 식물들은 허투루 하지 않았나 보다. 바람이 불고 해가 지는 일처럼 이런 사소한 일들이 삶을 견뎌내는 내밀한 힘이 되어 강산이 두 번씩이나 바뀐 세월을 건너와 꽃을 피워내는 즐거움을 우리들에게 선사해주고 있다.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내며 이제는 한 식구같이 되어버린 화분들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을 아니, 행운을 왜 나는 돈으로만 생각하였을까. 한 덩어리의 꽃을 피우기 위해 노력했던 행운목의 오랜 시간과 정성을 왜 돈과 맞바꾸려고 했을까. 행운이란 것이 어느 순간 갑자기 얻게 되는 로또복권 당첨의 횡재는 아니었을 텐데….

오랜 세월을 보내고 이제 막 피어난 그 꽃을 보고 이제는 로또 복권 사들이는 일은 하지 않기로 한다. 우리가 이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무탈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이미 크나큰 행운에 당첨되었다는 것을, 오랜 시간을 두고 꽃을 피워낸 잎들이 말하고 있었다.

이십여 년 만에 꽃을 피운 화초의 이름은 맥문아재비였다. 아아, 고마운 맥문아재비!

김영옥 수필가
김영옥 수필가

한목숨 열심히 살다보면 반드시 꽃 필 날이 있다는 사실을 이 화분 앞에서 깨닫는다. 그래, 산다는 것은 어쩌면 아름답게 견디는 일인지도 모른다. 모든 우리들처럼.

맥문아재비, 너는 이제 우리 집에서 피기 시작한 '세월의 향기'다. 나는 너를 맥문아재비로 부르지 않고 행운목과 함께 '세월의 향기!'라고 새 이름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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