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그거 신문에 난 거잖아"

이 말로 인해 상처를 받은 적이 제법 많았다. 난 신문을 거의 읽지 않는다. 그로 인한 불편도 크지만 신문이 알게 모르게 형성하는 바운데리에 매몰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호기심은 많아서 뭔가를 질문하면 위의 말로 막아버리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저 말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받은 상처 따윈 생각조차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을 지탱하는 한 축인 신문이라는 것이 그리 훌륭한 바탕이 아니며 오히려 자신들을 축소나 왜곡으로 몰고갈 수 있음에도 그에 대한 성찰조차 결여된 경우도 많다.

"스마트폰 검색하면 다 나와" 언론 매체에 지각변동이 일어난 지금 윗말이 자주 쓰인다. 표현은 다르지만 앞에 인용한 말과 대동소이하다.

저 말 역시 나는 달갑지 않다. 물론 나도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 모르는 것을 알 때의 흡족감이 일곤 한다. 그러나 저 말에 드리운 그늘을 우리 사회는 충분히 성찰하지 않는다. 우선 소통을 끊는 면이 있다. 무슨 질문을 한 경우 때론 답을 구하기보단 분위기의 물꼬를 트려는 수가 있다. 그 따스함이 무시된다. 또한 대화의 층위를 결정해버린다. 대화라는 것은 발설된 말의 층위를 기준으로 해서 오르내리거나 넘나들면서 주제의 심화나 외적 확장, 또다른 이야기로의 변주 등 당사자들만의 리듬으로 엮어갈 수 있다. 그 흐름 역시 차단된다. 이런 등등 외에도 질문의 위상이 격하되는 일이 벌어진다.

십년쯤 전에 통계학 박사이면서 대학 강사인 친구와 밤새워 술을 마신 적이 있다. 무슨 말을 하다가 통계학에 대한 질문을 해나갔다. 내용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평소에 통계학을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고 막상 전공자가 앞에 있기에 이왕이면 그 방향의 주제도 좋을 거라는 마음의 움직임이 있었다. 몇 주가 흘러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는데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날 니가 통계학에 대해 질문을 할 때 니 말이 하두 얼토당토않아서 뭐 이런 게 있어? 짜증도 일고 답답했어. 먹먹했고. 근데 너의 얼토당토않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해나가다보니 통계학이 뭔지 정리가 되더라고. 다음날 아침엔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통계학이 뭔지를 모르는구나. 통계학에 대해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이 통계학을 삼십년간 공부해왔구나."

화학과 교수인 친구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도 있다. "엔트로피에 따르면 우주에 생명체가 있을 수 없어" "왜?"

"닫힌 상황에서 모든 것을 비가역적으로 해체하는 것이 엔트로피인데 설령 생명체가 탄생되었다고 해도 버틸 수가 없어."

"우리 주변에 생명체가 많잖아." "그래도 안돼. 엔트로피는 우주의 법칙이야"

"풀도 있고 토끼도 있고 나도 있고 너도 있잖아."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그는 먹먹하게 앉아 있다가 "아. 그러네" 말하면서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 다음 학기에 자기의 화학과 대학원에 화학과 생명의 융복합에 관한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질문의 힘이다. 질문이 있고 없음에 따라 그 이후의 차원이 결정된다. 질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삶과 문화의 결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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