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오계자 소설가·보은예총 회장

거짓말을 했다. 밝힐까, 말까, 얼떨결에 거짓말을 해 놓고 이렇게 고민이다. 그래도 입 꼬리는 자꾸만 살짝 올라가는 행복한 고민이다. 언제 어떻게 고백을 할까. 또 전화벨이 울린다. "할머니, 수박에 물 줬어요?" "그래, 걱정 마라 잘 자란다." "할머니 고맙고 미안해요"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 이렇게 안부 전화가 올적마다 나는 태연하게 아니 아주 재밌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할머니에게 물주는 일을 시켜서 미안하단다. 할머니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외손녀는 여름에 수박이 주렁주렁 달리면 머리 하얀 증조할머니랑 외삼촌, 외숙모랑 수박 파티 할 꿈에 젖어서 행복하기만 하다.

어린 손녀는 설날 먹은 수박씨를 할머니랑 같이 호미 들고 마당 텃밭에 심자고 한다. 뒷감당은 어쩌려고 기상 이변으로 따뜻한 정월 초이튿날 그 제안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처럼 철이 들면 저절로 알도록 그냥 넘어 갈까. 이 할미는 슬슬 고민이 움트기 시작 했다.

한식날이다. 성묘를 하겠다고 아이를 데리고 모두들 왔다. 오자마자 외손녀는 내 손을 잡아당기며 수박부터 찾는다. 무어라 할 것인가. 설날 수박씨 심은 자리로 끌려가다시피 찾아 가면서 해명할 궁리에 몰두하던 중, 환성이랄 수 있는 감탄사와 손뼉소리가 터진다. 깜작 놀라서 돌아보니 앙증맞은 개망초 싹이 예쁘게 자라고 있다. 해마다 웬수같던 망초가 날 구원했다. 엉겁결에 망초 싹은 수박이 되어서 하나, 둘, 셋, 넷, 다섯 포기나 살았구나. 어린 손녀는 싹을 보고 행복하고, 나는 맘 한구석이 좀 휑하긴 해도 행복해 하는 손녀 모습 보고 행복했다.

물 잘 주라는 당부에 그러겠다는 약속은 했지만 여섯 살짜리의 행복을 깨부술 수는 없고, 그렇다고 구정에 설익은 수박의 씨가 얼지 않고 움이 트고 자란다는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을 그냥 넘어 갈수도 없다. 어찌 되었든 5월이 되면서 장날이 아니라도 이것저것 모종이 많이 나와서 수박 모 다섯 포기를 사다가 심었다. 드디어 토요일 어린이 날, 엄마랑 아빠랑 마당에 들어와 차가 멈추자마자 또 수박을 찾을 때, 흐뭇하게 안내했다. 행복해 하는 그 표정, 나는 어쩌란 말인가.

옆집아이가 산타할아버지는 없다고, 거짓말이라고 우겨도 아니라며 난 선물 받았다고 더 우기던 딸의 어린 시절처럼 그냥 둘까? 설에 심은 수박씨를 어떻게 설명하나. 도저히 우리 손녀의 행복한 꿈을 깰 자신은 없고 그렇다고 세상 이치, 자연의 이치를 가르치지 않을 수도 없다. 옛날 아이들과 다르게 지금 아이들은 논리적이다. 고민 끝에 오늘 전자 우편으로 고백했다.

"규리야, 설날 우리가 심은 수박씨는 얼어서 싹이 나올 수 없단다. 할머니 집에서 지금 자라는 수박은 모종을 사다가 심었단다."

이렇게 고백하고 봄에 씨앗을 심고 움이 트는 과정과, 가을에 심는 보리, 마늘등은 싹이 제법 자란 후, 그 뿌리가 튼튼해진 다음에 겨울을 이겨낸다는 몇 가지를 설명했다. 아직 내 편지를 열어보지 않았을 텐데도 나는 조바심이 난다.

오계자 수필가
오계자 수필가

드디어 저녁에 메일을 열었나보다. 휴대폰에 뜨는 번호를 보자 가슴이 콩닥거린다. 아니나 다를까 외손녀의 훈계가 시작 된다. "할머니의 딸은 거짓말을 젤 싫어하는데 왜 할머니 딸의 딸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메일을 열어보세요." 메일에는 예쁜 카드편지에 '할머니 사랑해'로 시작해서 저한테 그렇게 신경을 쓰는 할머니가 계셔서 행복하단다. 저를 사랑하는 마음의 거짓말이라서 용서 한단다. 용서 받아도 행복, 못 받아도 행복이니 손녀의 존재 그 자체가 내게는 행복덩이다. 주위 분들이 나더러 요즘 얼굴이 활짝 핀단다. 밤마다 내 사랑이랑 연애편지 주고받는 맛에 빠졌는데 어찌 피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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