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강전섭 수필가·청주문화원장

개양귀비꽃
개양귀비꽃

꽃들의 수런거림에 눈을 뜬다. 짙은 어둠이 희뿌연한 빛으로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창틈으로 스며든다. 창문을 활짝 여니 싱그런 바람결에 실려 휘감겨오는 쥐똥나무향이 그윽하다. 하루가 시작되는 뜨락엔 봄꽃들의 향연으로 시끌벅적하다. 어둠 속에 응축됐던 생명력 터지는 소리가 물결처럼 번진다. 형형색색의 꽃잎이 저마다 자태를 뽐낸다. 활활 타오르듯 피어나는 꽃들이 신세계로 이끈다. 피고 지는 봄꽃 중에 가장 눈길을 끄는 꽃이 개양귀비다.

개양귀비꽃
개양귀비꽃

내 영혼을 홀리는 꽃이 개양귀비다. 밤새 어둠 속에서 무슨 신기한 마법이라도 부렸는지 다양한 색으로 치장하고 유혹한다. 세상의 숱한 꽃 중에 이리도 오묘한 색상을 지닌 꽃이 또 있을까. 색채의 마술사 샤갈도, 고흐도, 천경자 화백도 그리지 못한 천상의 그림이다. 이 꽃은 누구를 그린 꽃일까. 안록산의 자욱한 말발굽 아래 스러진 경국지색 양귀비의 넋일까, 아니면 남강 푸른 물결 위에 몸 던져 정절을 지킨 의로운 논개의 환생일까. 이 꽃보다 더 붉은 마음으로 물든 꽃도 없으리라.

개양귀비는 염치와 인내, 겸손과 기백, 다산을 겸비한 꽃이다. 그녀는 자신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아는 듯 누가 볼세라 어둠이 풀어지는 묘시(卯時)쯤 살포시 껍질을 벗는다. 가을에 발아해 혹한을 견뎌내는 강한 생명력과 인내심을 지녔으며, 때론 위대한 자연 앞에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겸손함도 보인다. 긴 겨울을 이겨낸 내공 덕분일까. 낭창거리는 긴 꽃대궁 끝에 핀 품세는 가냘픈 듯하면서 항상 당당하다. 또한 미낭(米囊)처럼 생긴 씨방은 씨앗을 가득 품어 다산의 여왕이라 부른다.

봄을 보내고 여름을 부르는 보슬비가 내린다. 뜨락의 물상들은 빗소리에 화답하며 몸을 낮춘다. 봄비는 울안 들꽃들의 오만과 도도함을 떨쳐낸다. 천하일색 양귀비꽃도 봄비엔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며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 개양귀비는 화사한 얼굴에 물방울을 얹어놓고 고개를 숙인다. 언뜻 보기엔 무게에 짓눌린 몸짓 같지만 겸손을 일깨우는 무언의 화두처럼 느껴진다.

비가 내리면 꽃양귀비는 자신을 내려놓는다. 낮춰야 살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아는 듯하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귀를 기울이는 들꽃에게 삶의 지혜를 배운다. 돌아보면 세상은 온통 배움의 터전이다. 이청득심(以聽得心), '들음으로 마음을 얻는다.'고 하지 않던가. 살아가며 자신의 편견과 아집, 오만과 독선이 가득한 마음을 씻어내는 것은 경청이 최고의 선이요, 혜안이 아닐까.

강전섭 수필가·청주문화원장
강전섭 수필가·청주문화원장

꿈결 같은 봄날이 빗줄기에 실려 흘러간다. 사랑의 찬가를 부르던 뜨락에는 개양귀비 꽃잎이 흩날리며 붉은 꽃길을 만든다. 이 비가 그치면 오월이 가고 원숙한 여인을 닮은 유월이 올 게다. 어둠이 바래면 새벽이 오고 고통이 가시면 환희가 찾아오듯, 햇살이 퍼지면 꽃들은 저마다 자신의 향기를 전하며 또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리라.

야누스 얼굴 같은 오월이 떠나간다. 난 어느 꽃을 닮았을까. 가끔 나도 개양귀비꽃처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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