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느릿느릿 걷는다. 골목길 우측에 빨간 장미들이 자신들의 계절을 한껏 즐기고 있다. 며칠 전 세종에 사는 이에게 내 사는 곳을 설명했더니 장미꽃이 멋있는 곳이냐고 되물었다. 길지 않은 거리지만 소담스런 장미꽃들이 꽤나 인상적이었나 보다. 진홍빛 장미가 정염(情炎)을 떠올리게 한다. 언제부턴가 울타리 꽃이 된 장미는 마치 예전 귀족이 서민이 된 느낌이다.

초등학교를 지나 장구봉 동산 아랫길을 걷자니 아까시 꽃향기가 바람에 실려 온다. 어린 시절, 오뉴월 양관고개를 지나면 달큼한 그 향기가 내 무딘 감성을 일깨웠었다. 늘어지도록 많은 미색 꽃들을 달고 향기를 날려주니 고맙다. 아카시아로 친밀한 이름, 오히려 그 익숙함이 우리 고유의 꽃이 아님을 알려준다. 들어온 지 백여 년 세월에, 친숙하게 토착화되었다. 달큼한 꽃향기와 피는 계절을 생각하면 아예 아가씨나무, 아가씨 꽃으로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도시의 성장과 함께 커진 마을을 걷는다. 빼곡히 들어선 가게와 현란한 간판들에 발걸음을 늦춘다. 양편에 병사들 사열하듯 이팝나무들이 도열해있고 고봉으로 담긴 쌀밥처럼 꽃들이 푸지다. 이 땅을 살다간 선조들 삶이 얼마나 힘겨웠으면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 자신들의 넉넉함을 자랑하듯 하늘 향해 꼿꼿한 꽃들이 가상하다. 이 땅에서 먹고사는 문제가 사라진 게 언제쯤일까. 이 계절만이라도 흐드러지게 핀 이팝나무를 보며 지난했던 세월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로에 나오니 걷고 있는 곳으로만 눈길이 쏠린다. 아파트 담을 타고 장미와 함께 찔레꽃이 눈에 들어온다. 장미가 귀족이라면 찔레는 서민이다. 찔레는 비바람 맞으며 들판과 울타리, 산속에서 피어나는 야생의 감이 있다. 찔레꽃에서는 진한 정염 대신, 단아한 시골 이모나 누님을 보는듯한 아련함이 있다.

장미보다 찔레꽃이 더 친숙한 것은 왜일까. 내가 태생적으로 양반보다 서민에 가까워 그런가보다. 내가 나무라면 어떤 나무일까. 밋밋한 어린 소나무일 것 같다. 그다지 눈길을 끌지 않는, 조금은 붉은 빛 솔가지를 달고 있는 푸른 소나무. 그저 그런 모습으로 기억나지 않는 존재…, 서글플 게다. 스스로는 상록수, 소나무라 위안해도 장엄함이 없다. 따가운 햇살과 눈비 맞으며 세월을 참고 견디듯, 이 땅 한 구석을 지키며 조용히 살리라.

열흘 붉은 꽃 없다고 꽃피는 세월은 짧다. 기다림으로 싹이 트고 연두 빛 해맑은 잎들을 보여주는 나무들이 정겹다. 산책길 꽃과 나무들은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 모두가 초여름을 사는데 혼자 가을일 수는 없다. 자유로운 듯 구속받는 듯, 같은 틀 속에 여유롭게 살아간다. 화려함과 단조로움이 자연의 흐름 속에 함께 있다. 햇살이 숨고 주변이 스산해지더니 빗줄기가 땅으로 그어진다. 이 때는 나무와 꽃들이 하나같이 비를 맞는다. 이 빗속에 한층 더 짙고도 깨끗하게 성숙해질 게다.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한 무리의 꽃들은 이 비에 생을 마감하리라. 땅으로 내려와 화려한 일생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리고, 바람은 또 어디론가 그들을 몰아가리라. 생이란 게 다 그런 것이라고 수군거리듯 제 갈 곳으로 갈게다. 내일도 나는 살아남은 꽃들을 감상 겸 축하하러 이 길을 거듭 걸으며 장미와 아가씨 꽃과 이팝 꽃, 찔레들을 변함없이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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