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피곤으로 눕혔던 몸을 일으켰다. 나른하다. 바람 불고 텁텁한 날씨에 우산을 챙겨 산책을 나선다. 하늘에 먹장구름이 가득하다. 붓으로 그린 수묵화처럼 농담의 차이만 보이는 하늘에 구름이 흘러간다. 문득 생각난다. 이 땅에 살았던 수많은 이들이 이런 하늘을 보았으리라. 시대를 건너 같은 체험이 있다는 것은 공동의 화제를 갖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세월 속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밤에는 달뜨고 별들이 온통 하늘을 수놓는다. 달이 차고 기우는 일도 언제나 한결 같았을 게고, 사계절 별들도 큰 차이가 없었을 게다. 바람 불고 비 내리고 천둥 번개 치는 일도 여전했겠다. 때로 순조롭다가 수시로 홍수와 가뭄이 찾아오고 태풍이 불기도 했으리라.

이 땅의 뼈와 살, 핏줄 같은 커다란 산과 들판, 강들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 게다. 그곳을 수놓은 풀과 나무도 여전했겠다.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우고 누비며 살아가는 사람들만 나고 죽고 달라졌을 뿐, 살다간 흔적인 역사의 기록만 때로 요란하지 않았을까?

시선을 수평으로 하니 높고 낮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온다. 지은 지 채 50년도 되지 않았을 텐데 낡아 보이는 이유는 무얼까.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들도, 걷고 있는 포장된 도로까지 최근에 새로 만들고 깔았을 게다. 더러 눈에 띄는 이들이 입은 옷들은 새로 산 지 얼마나 되었을까? 낡아 보이지 않고 친숙하기만 한 것들은 수수만년이 되었고, 낡아 보이는 것들이 너무도 최근에 생겨났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크게 달라지지 않은 존재 중에 또 하나가 인간이다. 우리의 근본 모습과 구성이 옛날과 달라진 게 없다. 눈코입귀가 자리한 얼굴에 두 손과 두 다리가 있고, 그 기능들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입으로 먹고 뒤로 내보내는 과정이나 사물을 보고 판단해 행동으로 옮기는 순서가 같다.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시기와 질투까지도 그대로다. 이런 것들이 천 년이 넘는 세월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고전들을 접할 때,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일 게다.

그 누가 어릴 적 뛰놀던 고향이 변하기를 바랄까? 산과 들과 냇물이 몰라보게 달라진 곳에서 어찌 옛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길 수 있으랴. 심리적으로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들이 있다. 그런가하면 자신은 날로 달라지기를 원한다. 지난해보다 올해가, 어제보다 오늘이 괄목상대할 만큼 발전하고 성장하기를 기대하며 고단한 몸을 쉬지 못하게 한다.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여름 나무에 앉았던 백로가 날아오르듯 한 세대 윗분들이 하나둘 이 땅을 떠난다. 그분들의 생애를 생각하면 팔구십년의 세월이 허망하다. 한 평생의 삶속에 기쁘고 즐거웠던 순간들이 얼마나 되려나. 고생과 서러움과 아쉬움의 세월이 몇 배는 더 될 듯하다. 울음을 터트리며 이 땅에 왔다가 친지들의 슬픔과 눈물 속에 이 땅을 떠나야 하는 게 인생인가 보다.

짧은 산책길을 돌아 집이 보이는 골목에 이르니 어느새 먹장구름은 걷히고 언뜻언뜻 푸른 하늘이 얼굴을 내민다. 유구한 세월 이 땅 사람들이 보아온 하늘이다. 맑고 푸른 친숙함에 마음이 푸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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