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애경 수필가

해마다 이맘때면 이른 더위와 함께 불청객으로 찾아온 '봄'이와의 첫 대면이 떠오른다. 난데없이 딸아이가 안고 들어온 고양이 때문에 집안이 한바탕 난리가 났다. 잘잘못을 따지느라 언성이 높아진 틈에 어찌 알고 들어갔는지 녀석은 우리 집 제일 깊숙한 공간인 침대 밑을 점령해버렸다. 그렇게 고양이와의 기막힌 동거가 시작됐다.

유난히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고양이의 행동이 나날이 눈에 거슬렸다. 녀석을 데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딸이 독립해 나가고 대신 흑기사를 맡은 건 남편이었다. 그사이 고양이랑 정이 든 건지 딸의 신신당부 때문이었는지 세심하고 다정하게 보살폈다.

역류성 식도염으로 몸도 마음도 약해져 있던 남편에게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게 그때쯤부터인 듯싶다. 저에게 사랑을 주는 남편을 향한 녀석의 변화도 눈에 띄었다. 처음 보였던 경계의 표정이 차츰 사라지면서 서서히 남편 주위를 맴돌았다. 퇴근해 오는 남편을 맞기도 하고 어떤 날은 볕 잘 드는 소파에 나란히 누워 잠이 들기도 했다. 반려동물과의 교감이 치유의 약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지만, 여전히 내게는 기막힌 동거일 뿐이었고 그런 내게 고양이도 곁을 주지 않았다.

어느 날, 책더미를 옮기다 발을 다치는 일이 생겼다. 고통에 발등을 부여잡고 신음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고양이가 내게 다가왔다. 동거를 시작한 후 처음 듣는 울음으로 곁을 돌며 내 다리를 몇 번이고 툭툭 건드렸다. 반년이 넘도록 정도 안 주고 살았는데 위기의 순간에 제 식구라고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녀석의 불안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3번씩이나 주인들에게 버림받았다는 딸의 말이 떠올랐다. 묵은 젖이 도는 것처럼 가슴이 아렸다.

그날 이후, 먼저 다가와 준 녀석과 눈을 맞추는 시간이 잦아졌다. 측은한 마음으로 살피다 보니 습성이 보이고 습성을 이해하려 하니 마음의 빗장이 조금씩 열려갔다. 그렇게 우리의 기막힌 동거는 모양새를 갖춰갔다.

이제 갓 집사가 된 나는 반려인과 비 반려인의 중간쯤에 서 있다. 키우기 전에는 눈 흘기며 바라보았던 양육과정을 거치며 작은 생명의 온기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다.

반려문화는 이제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다. 더불어 그에 따른 사회적 갈등도 늘고 있는 추세이다. 반려동물에 지극정성을 들이면서 정작 부모나 이웃들에게 무례를 범한다거나, 기르던 동물들을 유기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대표적이다. 한 생명을 품고 마음을 준다는 건 분명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그만큼 비 반려인에 대한 배려로 성숙한 반려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절실한 시점이다.

김애경 수필가
김애경 수필가

반려의 사전적 의미는 '짝이 되는 동무'라는 뜻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배반하여 돌아섬'이라는 의미가 있다. 작은 생명체와의 교감을 통해 품는 법을 배우고 사람에게 곁을 주라는 주문이 아닐까 싶다.

모쪼록 나의 기막힌 동거도 멋진 반려로 완성되어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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