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강전섭 수필가·청주문화원장

아침부터 모기떼보다 독한 폭염으로 숨이 막힌다. 중복을 향해 치닫는 후텁지근한 열기 속에도 꽃은 피고 진다. 울안은 온통 노랑과 주황색 꽃물결이 넘실거린다.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는 들꽃의 향연에 눈이 즐겁다. 그중에 주황색으로 분칠한 작고 앙증맞은 꽃이 눈에 들어온다. 가장 애정이 가는 땅나리다.

땅나리는 볼수록 매력적이다. 군더더기 없는 발랄한 색과 절제된 모습은 가히 일품이다. 어느 발레리나의 몸짓도 여섯 장 주황색 꽃잎을 뒤로 말아 올린 땅나리의 고운 곡선만 못하리라.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곱게 단장한 수줍은 새악시 모습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눈웃음치며 유혹하는 요염한 자태다. 오묘한 분위기와 신비로운 색채를 지닌 꽃이라 오래 눈길이 머문다.

뜨락에 피는 땅나리는 두 종류다. 주황색과 노란색 땅나리다. 주황색 땅나리는 요염한 듯 보이지만 어찌 보면 잔잔한 노을빛처럼 다가오는 꽃이다. 하지만 노랑 땅나리는 깜찍하고 발랄한 모습으로 우울한 마음을 씻어준다. 같은 자식들이라도 아롱이다롱이이듯 땅나리도 색깔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이다. 앙증맞고 싱그러운 꽃송이를 보면 왜 꽃말이 '발랄, 열정'인지 알 듯하다.

처음 꽃을 기를 때 나리 이름이 많이 헷갈렸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고 생김이 다르듯, 나리도 각기 꽃잎과 잎사귀의 형태나 방향에 따라 이름이 달랐다. 꽃이 하늘을 보면 하늘나리요, 땅을 바라보면 땅나리, 중간쯤을 쳐다보면 중나리다. 잎이 우산살처럼 돌려나면 말나리이고, 어긋나면 나리이다. 이를 구분하고 깨우치는데 여러 해가 걸렸다.

여름은 나리꽃이 절정이다. 뜨락에는 여러 종류의 나리가 핀다. 솔나리, 하늘나리, 섬말나리, 땅나리, 참나리, 뻐꾹나리 등 종류에 따라 피는 시기와 자태가 조금씩 다르다. 그중 제일 도도하고 오만함이 넘치는 꽃이 주홍색 하늘나리다. 주근깨가 듬성듬성 박힌 꽃 모양은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는다. 어쩜 나리꽃 중에 가장 존재감이 없는 꽃이지 싶다. 하지만 은근히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겸손한 나리도 있다. 한여름을 수놓는 숱한 꽃 중에 바로 땅나리다.

땅나리는 겸손을 아는 꽃이다. 꽃이 펴서 질 때까지 오로지 땅만 보며 자신을 낮춘다. 제 분수를 알기에 자연을 맞서지 않고 순응하며 살아간다. 보기에는 가녀린 몸매지만 강인하다. 장마철에 젠체하는 꽃들은 광풍에 맞서고 폭우에 몸부림치다 산화(散花)하지만, 땅나리는 자연에 제 몸을 맡기며 잘도 견뎌낸다.

강전섭 수필가·청주문화원장
강전섭 수필가·청주문화원장

한 송이 꽃이 삶의 철학과 처세를 일깨운다. 가끔 우리의 삶도 예기치 못한 폭풍우로 휘청거릴 때가 있다. 땅나리가 자연의 이치를 거슬리지 않을 때 폭풍우를 비껴가는 것처럼 우리네 인생사도 순리대로 살아야 역경을 헤쳐 갈 수 있지 않을까.

저 눈앞을 스치는 땅나리꽃이 그냥 단순한 꽃이 아님을 깨닫는다. 미풍에 일렁이는 나리꽃들을 바라보며 도종환 시인의 '나리꽃'을 흥얼거린다.

'세월의 어느 물가에 나란히 앉아 / 나리꽃만 한나절 무심히 / 바라보았으면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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