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한병선 교육평론가·문학박사

우리는 권리의 상호성을 말할 때 흔히 '로빈슨 크루스의 역설'을 언급한다. 로빈슨 크루스는 프라이데이를 만나기 전까지 무인도에서 혼자 지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해도 들어줄 상대가 없으므로 그 권리는 무의미하다. 권리가 존재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를 들어줄 수 있는 상대가 있어야 한다. 즉,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상대가 있어야 하며 상대의 입장으로 보면 주장하는 사람도 객체가 된다. 이렇게 보면 권리는 의무를 전제로 한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학생들과 교권의 관계도 그렇다. 교사와 학생 간에 서로 권리와 의무관계로 맺어진다. 학생들이 주장하는 권리가 있다면 학생들도 학교가 요구하는 의무를 져야한다. 같은 맥락에서 교사들의 교권이 중요한 만큼 학생들의 인권도 중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교권과 학생들 인권이 종종 충돌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학생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만큼 교사들의 교권이 위축된다는 주장들이 그것이다.

학생과 교사는 학교라는 공동체 속에서 각자 1/n이라는 권리를 갖는다. 어느 쪽의 권리가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교사와 학생 상호간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조화롭게 공존해야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교육현장에서는 학생의 인권과 교권이 마치 대립되는 것처럼 본다. 학생들의 인권지평이 확대될수록 교육이 어려워진다는 말은 이를 잘 반증한다.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특성상 사제관계를 교사는 보호자라는 시각('부모대위설'), 더 나아가 '특수한 신분관계'로 본다. 전자는 '친권이양설'로 교사는 곧 부모를 대신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후자는 '군주와 시민의 관계'처럼 본다. 더 정확히 말하면 19세기 독일의 입헌군주제와 같이 사제관계를 특별한 권력관계로 보는 시각이다. 예컨대 군대나 교도소처럼 교사는 학생들보다 우월적 권력을 지니며 학생들은 교사의 지시에 무조건 따라야 된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사회의 기저에 존재하는 이런 잠재적 분위기들이 학생들의 인권과 교권의 균형을 어렵게 만든다.

학생들은 교육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켜나가는 존재다. 아울러 학교는 이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공간이어야 한다(세계인권선언 제26조2항). 이런 점에서 학생들은 학생대로 교사들은 교사대로 상호적인 권리와 의무관계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급선무다. 인권에 대한 지평은 점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인권은 단순히 인간의 정치적 권리확장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경제·사회적 권리의 확대를 넘어 다른 사람보다 나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는 쪽으로 확장되어가고 있다. '자결권', '평화권', '발전권', '서로 다름을 인정받을 권리', '지속가능한 환경'에 대한 권리 등이다.

인권학자 제러미 왈드론(Jeremy Waldron)에 의하면, 부부사이에 인권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면 그 결혼관계는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부부간에 서로 관계가 좋다면 이런 저런 것들을 인권이란 이름으로 따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학생들의 인권과 교권의 관계도 그렇다. 학생들의 인권 문제와 교권문제가 지속적으로 불거져 나온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교육현장이 인권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방증이다.

한병선 교육평론가·문학박사
한병선 교육평론가·문학박사

교육은 교사와 학생이란 상호 긍정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특징을 갖는다. 교권이 중요한 만큼 학생들의 인권을 지켜주는 것도 중요하다. 냉철하게 보면 교권은 교육활동에 국한된 제한적 권리일 뿐이지만 학생들의 인권은 보편성을 갖는 상위적인 권리다. 우리사회의 교권관을 지배하고 있는 친권 이양적 관점과 특별 권력관계 관점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교사들의 교권과 학생들의 인권이 대립적 관계가 아닌 공존의 발전적 관계로 더욱 진화되어야 한다. 향후 교권문제도 학생인권 문제와 마찬가지로 교사의 인권문제로 시각을 바꿔야 한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