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권 마을신문 기자들의 '세상 엿보기'
박정현 시민기자 (남제천 봉화재사람들)

월악찰진수수잔치
제천시 덕산면 지역작물인 '수수'를 주제로 한 '월악 찰진수수 잔치' 행사 현장 모습.


1965년 발표된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에는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로 첫 문장을 시작한다. 인정이 넘쳤다던 그 옛 시절에도 허물없이 밤 마실 나서는 게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장담컨데 유안진 시인이 여기 제천 덕산에 살았다면 이 유명한 문장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곳에는 '마실'이 있기 때문이다.

마을공동체 주민모임인 '마실'은 월악산 인근 제천시 덕산, 수산면에 자리 잡고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자발적인 주민모임이다. 지속가능한 농촌살이의 의미와 재미를 궁리하고 작당하는 '행복한 지역공동체'를 표방하는 마실은 (사)간디공동체가 뿌리가 되어 귀농, 귀촌인, 간디학교 교사, 학부모, 선주민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인문학강의 주막학교
매월 마지막주 목요일 밤 열리는 인문학강의 '주막학교'


주민모임 마실의 아지트인 마실공간을 찾았다.

마치 마을 복판 공터를 연상케 하는 넓은 마당을 끼고 있는 마실공간은 이곳을 가꾸고 꾸리는 사람들이 무엇을 지향하고 목적하는지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60평 남짓한 공간은 조목조목 딱 필요한 쉼터로 구성되어 있다.
 

작은누리도서관
작은누리도서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한켠에 자리 잡은 정말 '작은 도서관'이다.

세평 남짓한 서가에는 관록의 고전부터 문제적 신간까지 5천권 이상의 보물같은 책들이 포진 해 있다. 이곳을 운영하는 10여명의 자원봉사단 동아리는 '까사모'다. 까딱하면 사서가 될 뻔한 사람들의 모임이란다.

도서관은 독서공간 뿐 아니라 방과후 놀이터, 무더위 쉼터, 동아리 모임방까지 전천후 공간으로 활용된다고 한다. 도서관을 마주하고 고풍스런 조명을 뽐내는 공간은 '카페 소풍'이다. 100% 핸드메이드 마을카페란다. 회원들이 손수 꾸민 인테리어에 모든 집기도 기증과 기부로 채웠다니 놀라운 일이다.

차, 음식, 술, 수다모임 등 누구든, 무엇이든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주민공유공간이다. 언제든 내 집 같은 익숙함과 편안함을 제공함을 자랑한다.
 

호호장 한 장면
마을 축제 '호호장' 현장 모습.


마실활동을 일일이 열거함은 년중기획 정도의 지면이 필요하다. 대략적인 것들만 짚어도 엄청나다.

우선 마을살이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동아리 활동부터 보자. 남성합창단 그루터기, 풍물패 달굼, 24반무예-경당, 여성밴드 만성피로1234, 우쿨렐레 팅커벨, 글쓰기 무쓰, 몸살림운동모임, 사주명리공부모임, 기체조명상까지. 어지간한 문화센터는 울고 갈 규모다.

마을주민들과 함께 벌이는 정기적인 사업들도 다양하다.

매월 셋째주 일요일 열리는 플리마켓 '호호장', 매월 마지막주 목요일 밤 열리는 인문학의 향연 '주막학교', 매년 시월이면 이 지역의 소중한 작물 '수수'를 주제로 한 '월악찰진수수잔치' 이 모든 행사와 사업이 마실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진다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놀라운 사실 하나.

주민모임 마실은 그 흔한 입회원서 같은 것도 없단다. 회원 가입과 탈퇴 같은 테두리가 없다. 테두리가 없으니 회비납부 같은 의무도 없다. 그저 마음 내서 후원하면 그걸로 족한다.

마실의 규모를 가늠 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고리는 온라인 소통 공간인 마실 밴드다. 덕산면 인구가 2천명 남짓인데 밴드 가입회원이 200명이 넘는다.
 

제천시 덕산면 지역작물인 '수수'를 주제로 한 '월악 찰진수수 잔치' 행사 관련 자료사진.
제천시 덕산면 지역작물인 '수수'를 주제로 한 '월악 찰진수수 잔치' 행사 관련 자료사진.


"자연과 인간이 조화로운 삶, 이웃과 마을이 공존하는 삶, 재미와 의미가 함께하는 삶, 주민모임 마실이 상상합니다."

마실을 소개하는 홍보지의 마지막은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나 이 문장은 정정되어야 한다. 상상은 현실이 되었고 지금 여기서 실현 되고 있으니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한여름 찜통더위가 맹렬하다. 더위를 피해 마실 쉼터를 찾아든 청소년들의 경쾌한 수다가 무더위를 식힌다. 방역 3단계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어디에도 사람 그림자 보기가 쉽지 않은데 아이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니 더 반갑다.

코로나로 인해 모든 일상이 멈춰 버려 마실 역시 2년째 활동이 중단돼 버렸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어렵사리 주막학교 등을 진행하고 방역수칙을 준수하면서 소규모 모임만을 가동하고 있는 정도다.

언젠가는 다시 활기를 회복 할 시간이 올 것이다. 이웃과 마을이 함께하고 재미와 의미가 공존하는 궁리하고 작당하는 주민모임 마실은 그래서 오늘도 여전히 분주하다.

행여 제천시 덕산면을 오실 일 있거들랑 거리낌 없이 마실을 찾으시라. 아니 일부러 품을 내어서라도 한번 들러 보시라. 여기 한없이 순박하면서도 앙팡진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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