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약업사 널리 전하고파"… 주인 신종철씨, 건물 등 郡에 기증

청인약방 전경
청인약방 전경

[중부매일 이지효 기자] 지금이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약국이 많지만 현대적인 의료시설이 부족했던 1950년대에는 시골에서 약을 구입할 수 있고 아플 때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약방'이었다.

괴산군 칠성면 도정로3길 19. 200년 넘은 느티나무 옆에 자리한 '청인약방'은 1958년 개업 이후 그 자리를 지키며 지역 주민들의 건강 지킴이이자 사랑방 역할을 해왔다. 64년 동안 주민들 몸과 마음의 아픔을 어루만져줬던 신종철(90) 약업사는 지금도 여전히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나누고 있었다.

신종철 약업사
신종철 약업사

"약학대학이 생기기 이전에는 약방에서 수십년동안 양약을 취급하며 국민들의 아픈 곳을 낫게 하고 먹여살렸지. 내가 죽고 이 약방이 없어지면 약업에 대한 역사는 없어지는거여. 약대가 생기기 이전 약업에 대한 역사를 전 세계, 우리나라에서 1개뿐인 '약방 박물관'으로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신종철 약업사는 올해로 卒壽(졸수)인 90세이지만 목소리는 카랑카랑했고 몸은 왜소했지만 그가 주는 기운은 남달랐다.

청인약방 전경
청인약방 전경

신 약업사는 "여기는 200년 넘은 느티나무와 먼 옛날 일곱 신선이 바위로 변해 떨어져 북두칠성 모양의 소나무가 있는 이곳에서 살았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명당"이라며 "실제로 기(氣) 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많이 찾아와 이곳에서 좋은 정기를 받아갈 정도"라는 설명을 했다.

청인약방은 칠성면 두천리에 있던 양반집 별당을 옮겨 지은 것이라 했다. 그렇기에 약방 안쪽 마루는 200년이 넘은 것으로 못으로 된 이음새 하나 없이 옛 전통 방식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초대 통일주체 국민회의 충북 대의원 시절 빨간 원안이 신종철씨
초대 통일주체 국민회의 충북 대의원 시절 빨간 원안이 신종철씨

약방에는 현재는 나오지 않는 옛날 약부터 지금 나온 약은 물론 재털이로 기록해 보관하고 있는 1950년 6·25 당시 미군 대포 뇌관, 1963년 제작된 골드스타(금성, 현재 LG 전신) 선풍기를 비롯해 조그만 방안에는 어르신과 시간을 보낸 손때 묻은 물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1950년부터 써왔다는 일기장, 60년 넘은 라디오,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충북지역 대의원 사진이 있는 액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인이 들어간 사진 등 최소 50년에서 300년 전 목기까지 잊혀져가는 추억들로 가득했다.

일제 강점기 초등학교는 졸업했으나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 가난으로 중학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신 약업사.

그는 그래도 공부가 하고 싶어 서울 용산에서 고향 어른이 운영하는 한 치과에서 기공사 일을 비롯해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마포의 숭문중학교 야간부에 들어가 주경야독했다.

6·25가 발발하고 있을 곳이 없어진 그는 사흘에 걸쳐 다시 고향인 괴산으로 돌아왔고 이후 청주와 인천의 치과에서 일을 하다가 동생이 군 입대 하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약업사 허가증
약업사 허가증

고향에 돌아온 그는 어떤일을 해야하나 고민하던 중 당시 충북도 양약존상(양약 도매상) 회장을 맡았던 박인상 회장이 약방허가증을 내줬고 그것이 1958년부터 이어온 약방의 역사가 됐다.

약방을 여는데 많은 도움을 준 청주의 양약존상과 인천병원 원장 부부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 청주의 청(淸)과 인천의 인(仁)자를 따 청인약점으로 이름 지었고 시대의 따라 청인약포로 바꿨다가 현재의 청인약방이 됐다.

1950년부터 써왔다는 신종철 약업사의 일기장 /김명년
1950년부터 써왔다는 신종철 약업사의 일기장 /김명년

신 약업사는 지역에서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 등 50년 이상 지역을 위해 일하고 약방을 운영해 왔기에 지역 주민들의 생활을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1960년대에서 70년대는 농민이 70%였고 그중에 80%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지. 당시에는 문맹자가 많아 대서를 해줘야했지. 관혼상제를 비롯한 지역의 대소사를 다 돌봐줬었지."

그렇게 동네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지금으로 말하면 사망진단서 작성, 젊은 남녀가 결혼을 하면 주례를 서주기도 했다. 그렇게 주례를 선 것이 1천700명이란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청인약방 내부 모습 /김명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청인약방 내부 모습 /김명년

당시 돈을 빌리려면 보증인이 필요했는데 모두 청인약방을 찾았다.

"수백명, 나중에는 수천명이 찾아왔어. 사람이 어렵다는데 어떻게 그냥 보낼 수가 있어. 그래서 다 보증을 서줬지."

당시 빌려준 액수만 20억. 빌려간 사람의 2/3는 몇년이 걸려도 갚었지만 못 갚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차압이 들어오고 가지고 있던 재산을 팔아 갚은 것이 1960년대부터 시작해 40년이 걸렸다.

"다른 사람들 챙기느라 내 가족에게 못한 것이 아직도 마음이 아파. 자식이 3남매가 있는데 학비 빼고 1원도 못줬지. 부인에게도 옷 한벌 사주지 못해서 그게 너무 미안해."

하지만 그런 신 약업사의 마음을 알았는지 3남매 모두 서울 명문대에 진학했고 장성해 아버지 마음의 짐을 덜어줬다.

신 약업사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 '인과응보'를 생각하게 됐다"며 "다른 사람한테 베푼만큼 자식들이 잘됐고 그것을 감사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청인약방 내부 모습 /김명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청인약방 내부 모습 /김명년

이미 70세에 충북대병원에 신체 기증 의사를 밝힌 신 약업사. 90의 나이가 되니 건강도 예전같지 않아 지난 7월 약방 폐업신고를 했다. 그리고 지난해 5월 근현대 약업사 보전을 위해 약방 박물관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곳을 괴산군에 기증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매일 오전 9시면 약방에 나와 손님들을 맞고 있다.

64년간 지역 주민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줬던 신종철 약업사 /김명년
64년간 지역 주민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줬던 신종철 약업사 /김명년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잊혀져 가는 약업사를 약방 박물관을 통해 알리고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야. 약방을 찾는 사람들에게 꼭 하는 얘기가 있어. 주어진 여건속에서 바르고 성실하게 생활하고 남을 돕고 사는 것이 사람의 참된 길이고 인생의 길이라고. 그러면 분명 좋은 일이 생길거여."

사람답게 사는 '인과응보'를 실천하며 약업사로 평생 살아온 신 옹의 바람이 그가 생존해 있을 때 이뤄지기를 바라본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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