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이색적인 영화를 봤다. '알리와 니노'가 제목이며 아제르바이잔이 주요 무대이다. 아시아의 서쪽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나라이다.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셋을 합해 코카서스 삼국이라고 부르는만큼 코카서스 산맥이 흐른다. 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이 겹치는 시기. 공간적 및 문화적으로는 서구와 아시아, 기독교와 무슬림 간의 경계에 위치하다보니 갈등의 골들이 깊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보니 주인공 남녀 간의 사랑이 희망적일 수만은 없다. 남주인공은 아제르바이잔의 무슬림 남자이며 여주인공은 그루지아의 공주이다. 그녀는 기독교의 일파인 그리스 정교 신자.

1차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환경이 다르게 살다가 결혼한 그 부부가 맞는 상황들이 평화롭다가도 극적 충돌로 바뀌곤 한다. 러시아의 침공 속에 둘은 사랑하면서도 비극으로 끝난다. 이런 흐름의 영화 감상을 하는 동안 '로미오와 줄리엣'이 스쳤다. 세익스피어의 그 작품 역시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다. 거기선 갈등의 축이 가문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 사랑하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로미오가 독약을 먹고 죽으며 줄리엣이 뒤따라 자살한다. 독자는 그들이 사랑함을 알기에 해피 엔딩을 바란다.

문학은 잔혹 역시 생명처럼 여기는 독종이라 독자들의 그 애틋한 마음에 칼을 꽂는다. 독자들은 자신의 꿈이 배반 당하며 칼에 찔린듯 아프다. 그러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적은 카타르시스는 문학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뭐니 화려한 꽃들을 피워대도 2500년 전쯤에 간파해 정립한 그 사유는 여전히 유효하다. '알리와 니노'에도 해당된다.

환경문제니 에너지 문제니 온갖 병폐들은 대강 200년 전 이후의 산물이다. 그렇게 문제가 많음에도 그후 지금까지의 세상에 대해 진화니 발전이니 장미빛 찬사를 늘여놓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만 보더라도 사유가 과거에도 깊은만큼 근현대만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장밋빛 찬사를 늘여놓는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필요도 있다. 물론 잘 안보인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철학이다. 철학의 눈을 통하면 그들의 속내가 보인다. 그들은 애써 모아놓은 자산이 한순간에 날라갈지 몰라 광고건 세뇌건 뭐든 통해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 수준으로 잡아매려 안간힘 쓴다.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시킨 '알리와 니노' 역시 사랑 이야기 속에 철학을 심어두고 있다. 비극을 통해 '세상이 왜 하필 비극이어야 하는가?' 준엄하게 묻는다.

사과의 발원지로 추정되는 곳이 발칸 반도와 더불어 코카서스 지역이다. 영화에서 보듯 그 지역이 경계에 처한 아픔이 누적되어 있다고 한다면 사과의 이동 경로는 그 반대 성격을 지닌다. 코카서스 지역에서 발원되었든 발칸 반도에서 왔든 사과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바람, 코카서스 산맥의 햇빛과 공기 속에 맛있게 자라 서쪽으로도 동쪽으로도 퍼져나간다.

서양 문명에서 중요한 상징의 하나가 사과이다. 성경의 선악과. 빌헬름 텔의 사과. 카프카의 <변신>에도 사과가 나온다. '변신'의 주인공은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얻어맞아 죽는다. 서양 문명이 한 인간 존재를 벌레로 만든 것도 모자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해석 가능하다고도 나는 본다. 사과는 동쪽으론 인도, 중국 등지를 거쳐 우리나라에도 이른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코카서스 지역은 이렇듯 내겐 구심력과 원심력 양면으로도 보인다. 나라들은 주변국들과 이질적인 문화들에 에워싸여 밀도로 구겨지는 바도 커 보인다. 바로 그곳에서 자라는 사과는 동서양으로 널리널리 퍼지며 인류 문화를 풍부하게 해왔다. 매력적인 코카서스 산맥이 배경의 일부로 나오는 영화 '알리와 니노'는 다채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매력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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