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일주 공주문화원장

최근 며칠간의 비로 기온이 완연하게 내려갔다. 태풍이 지나가며 일부 지역에는 큰 피해를 입혔는데도 파란 하늘에는 마치 낮은 건물에도 걸릴 것 같은 뭉게구름이 가득 밀려왔다 옮겨가곤 한다. 요즘 날씨만 보면 오랜 코로나시국으로 심신을 더 더욱 지치게 했던 여름 무더위가 많이 물러간 것 같다. 아직도 한 낮에는 덥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도지난달 28일에 개막한 공주의 '금강자연미술센터'가 있는 연미산 위로는 가을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추석을 앞두고 분명 절기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어느 사이에 백로(白露)가 다가왔다.

처서와 추분 사이에 드는 백로는 1년 24절기 중 열다섯 번째 절기로 밤 기온이 내려가고 새벽 풀잎에는 맑고 흰 이슬(白露)이 맺혀 소리 없이 가을 기운이 찾아 든다. 이때는 맑은 날이 계속되고, 낮에는 '따끈하다'는 느낌이 드는 날씨로 들녘의 오곡백과가 잘 여물어 간다. 그래서 백로 때 날씨가 좋으면 하루 땡볕에 쌀이 12만섬이나 더 거둬들일 수 있다는 오래 전(1998년) 통계도 있을 정도이다.

지금은 영농 기술이 좋아 과일의 제철이 언제인지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옛날에는 백로 때 포도가 익어가서 백로에서 추석까지의 기간을 '포도순절(葡萄殉節)'이라고 하여 옛 어른들은 '포도순절에 기체만강하시고…'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편지를 잘 썼다고 한다.

또, 옛날에는 주렁주렁 달린 포도알은 다산(多産)을 상징하여 첫 포도를 따면 사당에 먼저 고한 다음 그 집 맏며느리가 한 송이를 통째로 먹어야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백자에 포도무늬가 많은 것도 역시 같은 뜻이라고 하고 어떤 어른은 처녀가 포도를 먹고 있으면 망측하다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어릴 때 어머니가 포도를 한 알, 한 알 껍데기와 씨를 가려낸 다음 자녀의 입에 먹여 줬다고 하여 부모가 자녀를 애틋하게 키운 정을 '포도지정(葡萄之情)'이라고 하였다.

이일주 공주문화원장
이일주 공주문화원장

경상남도의 섬지방에서는 '백로에 비가 오면 십리(十里) 천석(千石)을 늘인다'고 하여 백로 때 비가 오는 것을 풍년의 징조로 생각했다고 하며 또, 백로 무렵이면 고된 여름 농사를 다 짓고 추수까지 잠시 일손을 쉬는 때이므로 근친(覲親)이라 하여 시집간 딸이 친정에 가서 어버이를 뵙고 왔다고도 한다.

이와 같이 우리 선조들은 백로 절기를 계기로 하여 혹독했던 무더위와 고된 노동의 큰 고통을 극복하고, 오히려 새로운 꿈과 희망을 도모했다는 교훈을 남겼음을 잘 알 수 있다.

바라건대 이번의 백로와 추석명절을 거치면서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크나큰 고통이 완전히 소멸되고 풍성한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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