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장마 얘기
어릴 적 장마 얘기
  • 중부매일
  • 승인 2021.09.1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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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뜨락] 최종진 충주효성신협이사장·전 충주문인협회장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빛바랜 유년 시절 내가 살던 강촌은 언제나없이 8월이 오면 비릿한 물 내음과 나룻 긴 사공의 구성진 뱃노래가 한가로워 두보의 시구가 저절로 생각나는 전원 풍경이었다. '맑은 강 한 굽이 마을을 안고 흐르는데(淸江一曲抱村流)/ 기나긴 여름 강마을은 일마다 한가롭네(長夏江村事事幽)'

어릴 적 나는 뜨악한 강나루를 하릴없이 촐랑이며 굼실대는 고기떼를 향하여 돌팔매질을 하거나 강과 산으로 숯검뎅이가 되어 쏘다니는 게 하루 일과였다.

열두 살 되던 해이던가? 그해 여름은 모질게도 가물어 마을 인심마저 모나고 엄니의 밤마실도 뜨음해져 갔다. 여전히 나무 기둥에 매달린 스피커 일기예보에는 비가 온다온다 하면서도 기다리는 단비는 쉽사리 내려주질 않았다.

벼 포기 사이로 갈라진 거북등 같은 논바닥이며, 조,수수,콩잎이 누렇게 말라가는 모습을 대책없이 지켜보기만 했던 순박한 농심의 아픔을 어린 마음에 어찌 깊숙이 헤아릴 수 있었을까만 마을 어른들은 두서넛이 모여도 온통 비 얘기뿐이었다.

그렇게 비가 내리지 않은 채 불볕더위는 5일장이 두 파수 족히 지나서 벼이삭 배동이 어렵게 설 무렵 천둥번개를 동반하더니 저녁부터 장대비가 퍼부어 댔다. 이건 아예 물동이로 쏟아 붓는 듯 하였다. 비설거지를 동동거리며 해대고, 강변에서 가까운 우리 집은 호야등 심지를 돋운 채 밤을 꼬박 밝혀야 했다.

말라붙은 계곡에서 붉정물이 벌창을 하고 번갯불 속에 언뜻 비추이는 동구밖 고목의 느티나무가 그리 섬뜩할 수가 없었다. 엄니는 연신 "가뭄 끝은 있어도 장마 끝은 없다는데…"하시며 혀를 끌끌 찼다.

칠흙같이 어두운 한밤중 싸리 대문까지 널름거리며 차오르던 물길은 더 이상 불어나지 않고 새벽녘부터 빗방울이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부윰히 날이 새자마자 시제답 닷 마지기가 있는 무너미 논에 가보니 이건 숫제 논이 아니라 돌자갈로 뒤덮인 영락없는 자갈밭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 보던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연거푸 황색연초만 말아 피우시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계셨다. 어디 그뿐이랴 오후에는 물구덩이가 된 삼밭의 지주를 일으켜 세우며 우리 가족은 하늘만을 원망하였다.

강물이 줄 때까지 나룻배가 다니지 못해 사흘인가 우리 동네 아이들은 학교를 가지 못했고 어른들은 삼십 리를 돌아 장을 다녔다. 그해 장마로 인하여 우리 가정에 드리웠던 모진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가난의 굴레 역시 쉽사리 떠날 줄을 몰랐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때만 해도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은 그저 한없이 무력한 존재로 모든 걸 운명이라 여기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장마를 대비한 수방대책과 재해에 대한 사전점검에 정책결정이나 행정관서의 발빠른 대처가 모두 느슨했으니 말이다.

최종진 충주효성신협이사장·전 충주문인협회장
최종진 충주효성신협이사장·전 충주문인협회장

반세기가 돼 가는 올해도 도시를 흐르는 제방이 난데없이 붕괴되고,하수구가 범람하여 물난리를 겪고, 예기치 않은 산사태와 도로가 침수되는 등 한바탕 법석을 치르고 난 뒤에야 수방대책에 소홀했던 원인이 규명되고 으레껏 수재냐,인재냐하는 엇갈림의 잣대를 곱씹는 게 다반사이다.

이제 바라기는 여름이 모든 재해와 재난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우리의 삶이 안전하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계절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아직도 생채기 난 아픔을 꼭꼭 여미고 살아가는 수재민들이 적지 않게 잠자리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겸허히 눈 돌려 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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