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유재풍 변호사

추석 지나니 바로 추분(秋分), 해가 짧아지기 시작했다. 하나둘 나뭇잎들이 퇴색해서 떨어질 준비를 한다. 그렇게 가을이 오고 시월이 왔다. 올해도 1/4밖에 남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다니, 나이 들수록 시간의 흐름이 빠르게 느껴진다. 어떤 이는 추억거리가 많은 사람에게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빠르게 흐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추억거리가 없는가. 딱히 그렇지는 않다. 매일 즐겁게 살려고 한다. 모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려 한다. 매일 추억을 쌓으면서 살려고 한다.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 등에 그 추억을 남기기도 한다. 그리고 반추한다. 내가 보낸 어제, 지난주, 지난달, 올해라는 시간, 그 너머까지.

그러면서 과연 잘 살아왔는지 되짚어 본다. 늘 즐거운 것만 아니고, 늘 걱정거리만 있는 것 아니다. 적당히 뒤섞여 있다. 원래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좋은 말로 조화(調和), 나쁜 말로 혼돈(混沌) 또는 뒤죽박죽. 살아온 날을 반추하고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산다. 그렇지만 여름 내내 열어놨던 창문을 닫아야 하는 시절에 이르러 올해가 1/4밖에 남지 않은 것을 깨닫는 순간, 뜻한 대로 살지 못한 과거에 대한 회오(悔悟)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염려가 긴장시킨다. 그때 성경 에베소서 구절이 생각났다. '세월을 아끼라.'(에베소서 5장 6절)

왜 아껴야 하는지는 안다. 빨리 흐르고, 단 한 번뿐이고, 돌아갈 길 없는 것이 세월이니. 문제는 어떻게 아껴야 하는지다. 기독교에서는 촌음을 쪼개 쓰는 것보다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삶을 강조한다. 이 시대, 이 장소에 나를 보내신 그분의 뜻을 헤아려 그에 맞춰 사는 것, 곧 소명(召命)의 완성을 위해 진력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자 각자 다른 재능(탤런트)을 주고 그것으로 서로 잘 섬기며 살라 하신다. 탈무드도 공감한다. "당신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유일한 목적은 이 짧은 생애를 허락한 신이 당신에게 부여한 소명을 잘 수행하라는 것이다." 이는 곧 직업으로 발현될 터, 결국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법률가로 부름을 받아 40여 년 그 일에 종사해왔다. 법률적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성심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 곧 내 소명이다. 그러면 그 소명을 어떻게 실천할까. 25년 전 법률사무소 개소 때, 감명 깊게 받은 성구가 있다. 골로새서 3장 23절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 정성을 다하십시오.'가 그것이다. 그렇게 하면 된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섬기는 것,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이다. 톨스토이도 그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는 일,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라고.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다. 그런 후회 하지 말자. 그러기 위해서는 호라티우스가 말한 바,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내일 또 내일 미루다가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19세기 미국 목사 찰스 쉘던의 책 제목대로, 과연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원제 'In His Steps') 물어가며 살고자 한다. 삶의 무게, 높이, 깊이 모두가 그것에 의해 결정될 것 같다. 다시 맞은 시월. 언제까지 맞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시월은 내 인생에 단 한 번뿐이다.

유재풍 변호사
유재풍 변호사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온다고 실러는 말했지만, 그 불확실성 속에 더 큰 가능성이 숨겨져 있음을 안다. 최선을 다할 것, 그렇지만 조급해하지는 말 것. 지금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최고의 계절이지만, 찬 바람 불 날이 곧 닥칠 것이다. 소명의 완성을 위해 가장 유용한 것에 시간을 사용하라. 1/4밖에 남지 않은 올해에 대해 무거운 책임을 느끼며 시작하는 시월, 거기 추수를 기다리는 황금벌판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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