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윤희 수필가·충북수필문학회장

상가가 양옆으로 늘어선 시장 통으로 들어섰다. 행인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은 예도 마찬가지다.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오래된 간판 몇몇이 눈에 띄었다. 그중 한곳을 찾아 들었다. 오토바이 상점이다. 40여 년 세월, 이 자리를 지켜온 토박이다.

옛날, 구말장날이면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 한다. 어디서 그렇게 몰려들었는지. 시장 통이 사람들의 머리로 온통 새까맣게 보일 정도였다고 회고하는 주인장의 눈빛이 아련한 옛 시절을 더듬고 있다. 어느 틈에 가게의 내실 쪽에서 걸어 나온 안주인도 슬그머니 끼어들어 이야기를 보탠다.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있어도 반달이 되어 있는 눈에서 좋았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즐거운 회상에 젖고 있음이 느껴진다.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다. 더구나 호시절의 추억은 더 말해 무엇 하랴.

"1970년대부터 80대까지 돈 좀 벌었지. 그때는 오토바이가 자가용이었잖어. 여기서 장사하며 애들 다 키워 학교 보내고, 성가 시켰으니 고마운 일이지."

그랬다. 1970년대 말, 내가 혼인할 당시에는 정말 집집이 오토바이가 자가용이었다. 출퇴근하는 공무원도 대다수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읍내에서 각 면 단위로 갈 정도의 거리는 아무렇지 않게 타고 다녔다. 당시 우리 집 자가용도 '88 오토바이'였다. 남편 뒷좌석에 큰아이를 앉히고, 내가 막내아들을 포대기로 업으면 네 식구가 거뜬히 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그때는 대개 그렇게 지냈다. 휴일이면 우리 자가용은 온 가족을 태우고 탈탈거리며 나들이 길을 나섰다. 비포장 길이라도 털썩 엉덩이 한번 들었다 놓으면 그만이었다.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 아득한 옛이야기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각 가정마다 승용차가 일반화 된 지금도 오토바이 가게 주인장은 크게 아쉬울 것 없는 듯 편안한 얼굴이다. 그때 산 내 가게라서 현재 손님이 많지 않아도 월세 나가지 않으니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두 부부의 말속에 낡은 가게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난다. 그에게 이 오토바이 상회는 이제 돈을 벌기 위한 곳이 아니다. 평생을 반려한 친구요, 동반자로 함께 지켜갈 곳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도 떠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에게 삶의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김윤희 수필가·충북수필문학회장
김윤희 수필가·충북수필문학회장

집집마다 자동차 없는 집이 없는 이 시대에 누가 오토바이를 사러 올까 싶었는데 시절이 변하면 변하는 대로 사람 있는 곳은 사람이 찾아오기 마련인가 보다. 오래 그 자리를 지켜온 덕분에 요즈음엔 인근 지역에서 사람들이 찾아온단다. 특히 외국인 근로자와 택배 배달 업자가 많이 찾아와 그런대로 재미가 쏠쏠하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택배 사업이 성행하다 보니 퀵서비스가 발달하고, 여기에 오토바이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반 음식점도 배달 위주로 영업이 이루어지고 신종 배달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주로 오토바이를 이용한다. 사양길에 들었던 오토바이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듯 부릉부릉 다시 활기를 찾았다. 인생은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굴러가는 것인가 보다. 가게를 나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때마침 외국인 근로자 한 사람이 가게 앞에 오토바이를 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작금의 현실이다. 우뚝우뚝 건물이 솟아오른 충북혁신도시 그 이면에 흑백필름처럼 향수를 원도심이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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