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칼럼] 김동우 논설위원

책은 경험, 사상 등 인위적 지적 생산물이나 자연 현상을 글자 등의 형태로 종이에 인쇄한 매체다. 온갖 기록의 저장고다. 아주 먼 옛날 글자가 만들어지기 전 정보나 지식 등의 전달 방법은 구전(口傳) 또는 몸짓이 전부였다. 시공간을 초월한 전달은 불가능했다. 글자가 만들어지면서 전달의 지평이 확대되었다. 글자를 쓰거나 새긴 물건이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물건이 바로 책이다. 책은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공간을 책 속에서 사유를 통해 전달하고 소통할 수 있다.

'책'은 우리말이 아니다. 한자어다. '冊'이다. 이 모양으로 '책' 글자가 탄생한 데는 사실(史實)이 있다. '죽간(竹簡)'이다. 이는 2세기 초 종이가 발명되기 전(서기 105년)까지 종이 대신 사용되었던 대나무 패(牌)의 엮음이다. 길게 자르고 쪼개(30~60㎝) 잘 다듬은 대나무 겉면에 글자를 한 글자씩 내려 새기거나 썼다. 필기도구는 칼과 붓이었다. 대나무 패를 '간(簡)'이라 했다. '간' 양쪽 끝에 구멍을 내 편철(編綴)한 것이 '죽간'이다. 다른 나무에도 글자를 새기거나 썼다. '목간(木簡)'이다. '간독(簡牘)' 역시 죽간의 일종이다. '독(牘)'은 '글자를 쓴 나무 조각'이다. 이 '간이나 독'을 꿰어 길게 엮은 형상을 본 따 만든 글자가 바로 '冊'이다.

'冊'은 대나무 패, '죽간'을 꿰었다는 의미보다 질, 양적인 정보나 지식 등을 꿰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책은 고기. 채소, 과일 등 다양한 먹거리를 하나의 꼬치에 꿴 꼬치구이와 같은 셈이다. 꼬치구이는 여러 가지 음식을 한방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책은 온갖 정보와 지식 습득은 물론 지적 상호작용이 시공간을 넘어 가능한 교류의 장이다. 책은 일타쌍피(一打?皮)의 기회다.

죽간을 대표하는 고사성어가 있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이다. 공자가 죽간의 형태인 <주역>을 수없이 읽다 보니 주역을 엮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 그럴 때마다 새 가죽끈으로 주역을 다시 엮었다. 주역을 엮은(編) 가죽끈 위(韋)가 세 번 끊어졌다 해서 '위편삼절'이라 했다. 학문의 자세와 열의를 함의(含意)한다.

책을 펴낸 사람을 '저자(著者)'라 한다. '著'는 '대나무 죽(竹)'과 '사람 자(者)'의 합성어다. '저자'가 대나무 패, 죽간에 글을 썼거나 새긴 사람에게 연유됐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자신과 타인의 사상이나 상상, 자연과 사회현상에 대한 분석 등을 글자로 기록한 사람이다. 책을 펴내는 행위는 그런 기록들을 논리적으로 꿰는 일이다.

'청사(靑史)'라는 글자가 있다. 역사상의 기록, 역사책을 뜻한다. 후대에 모범이 될 인물이나 훌륭한 발자취나 업적에 대한 기록 등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인다. '청사에 길이 빛날 인물과 업적…', '청사'는 푸른 역사다. 푸른 역사라니! 그 유래는 '죽간'에 있다. 글자를 새기거나 쓰일 대나무 '간' 앞면이 푸르기 때문이다.(실제 죽간을 만들 때는 불을 사용해 푸른색을 없앴다) 당시 대단한 업적이나 역사가 아니면 죽간을 도나캐나 만들지 않았다. 주로 임금이나 천자의 명령인 부명(符命)을 기록했다는 사실(史實)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일단 만들어진 죽간은 길이 남을 역사다.

책이 범람하고 있다. 홍수처럼 쏟아진다. 장식용이든 지식 습득용이든 책장이 없는 집이 없다. 도서관이 곳곳에 들어서고 장서도 넘친다. 서점은 무수한 책들을 곱게 화장시키고 주인을 기다린다. 하지만 책은 내민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옆구리만 보여주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한다. 대다수 책이 급기야 시선에서 벗어나 숨도 쉬지 못한 채 주인 만날 기회를 잃어간다. 지식의 저장고 곳곳에 쥐구멍이 나고 있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입이 먹는 물질의 먹거리 양식(糧食)과 머리가 먹는 비물질의 지식 양식(良識)이 있다. 삶에 모두 필수요건이다. 문제는 물질 먹거리는 갈수록 느는 반면, 뇌 활성화를 통해 사유를 유발하는 지식 먹거리는 양적 풍부함에도 영상매체에 맥없이 밀린다는 점이다. 영상매체는 사유력을 감소시켜 두뇌를 둔감하게 한다. 급히 망막을 스쳐 무언가 표상(表象)할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하지 않아도 생각이 인색한 인간의 뇌가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인간은 인지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어떤 생각을 깊게 하는 것을 싫어한다) 역할을 더 강화하고 있다. 인간은 사유하지 못한 채 편견과 선입견에 빠지게 된다. 결국, 배부른 돼지는 늘고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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