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소묘
가을 소묘
  • 최동일 논설실장
  • 승인 2021.10.2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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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뜨락] 이은희 ㈜대원 전무이사·수필가

가을 햇살에 소사나무가 노랗게 물들어간다. 나무 발치에 자리한 채송화는 파리하고, 줄기 끝의 씨방은 알차게 여물어 있다. 바지런한 씨앗은 이미 주변에 화분으로 날아가 보금자리를 잡았으리라. 키다리 백일홍꽃 씨방도 누렇게 발하여 씨앗을 거두기를 기다리는 듯하다. 일년초는 부지런하지 않으면 씨앗을 챙길 수가 없다. 씨방이 썩지 않도록 햇볕에 바싹 말려두어야 내년에 꽃을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날씨는 어느 시인의 말대로 "햇볕은 적당히 따갑고 바람은 설렁설렁 맑다." 하루가 다르게 날씨와 풍경이 바뀌고 있다. 부엌 쪽창에 비친 백화산 산마루의 빛깔도 노르스름하다. 소설가 이상은 "산촌에서는 가을이 하루에 엽서 하나씩 메울 만큼씩 온다."라고 했던가. 내가 머무는 도시의 가을은 군화를 신은 군인의 발걸음처럼 성큼성큼 다가오는 느낌이다.

하늘정원의 묘시는 기온 차가 심하여 쌀쌀하기가 이를 데 없다. 우암산 자락도 운무가 깔려 어느 날은 산의 허리춤만 보이고, 우회도로는 흰 뱀이 기어가는 듯한 형상으로 출현한다. 여름날 묘시에 일어나 식물을 가꾸던 일이 어제 일처럼 묻혀간다. 가을이 깊어 갈수록 정원의 소일거리도 줄어든다는 증거이다. 이제 소요유(逍遙遊)를 말한 장자처럼 가을이 그리는 풍경을 한유하게 감상할 때이다.

한국의 청명한 가을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무형의 가치를 어찌 수치로 헤아리고 물적인 걸로 바꿀 수 있으랴. 투명한 가을 햇살을 그 어떤 것으로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늘빛이 예전만 같지 않아 안타깝다. 자연도 생물도 아끼고 보호하지 않으면, 이전의 상태로 회복이 어렵다는 걸 코로나 19가 보여준다. 보통의 날이 이어졌다면, 아마도 지금쯤 산과 들로 단풍 여행을 떠나느라 도로가 미어지리라. 집에서 생활하는 날이 많아지니 주위에 만물이 눈에 들어오고, 하늘바라기를 하는 날이 많아진다. 더도 덜도 말고 오늘처럼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이 이어졌으며 하는 바람이다.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쨍한 날씨가 어디 가을뿐이랴. 이내 따라오는 추운 겨울도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다. 오죽하면 인터넷 아이디 별명이 '겨울아이'라고 했겠는가.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 바지랑대에서 펄럭이던 빨래가 널빤지처럼 얼어붙고, 코흘리개 친구의 훌쩍거리는 콧물도 고드름으로 매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날은 비루포대를 어깨에 메고 과수원집 구릉지로 달려가 추운 줄도 모르고 얼음 썰매를 지친다. 어둑어둑할 즈음 집으로 돌아오면, 더럽혀진 옷차림 탓에 어머니에게 "어디를 쏘다니다 왔느냐."고 말 소나기를 억수로 맞는다. 돌아보니 어머니에게 혼쭐이 나도 그 시절이 그립다. 이 그리운 날도 모두 가을이 지나고야 온다.

하늘정원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운무에 휩싸인 산이 바다 위에 떠있는 섬처럼 보인다. 나무들은 성큼 들이닥친 운무 군단에 부지런히 채비를 서두르리라. 나뭇잎은 금세 울긋불긋해질 것이고, 사람들은 그 모습에 '단풍이 들었다'고 환호성을 지르리라. 잎이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이 오면, 나도 가을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 침잠하리라. 오늘도 자연이 빚은 오묘한 서사는 찬란하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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