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칼럼] 김동우 논설위원

최근 연인 시절 불법 촬영물을 미끼로 헤어진 여친을 자주 불러 내 성폭행을 일삼은 혐의로 20대 남성이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피해 여성은 불법 촬영물 때문에 남성의 강요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데이트 폭력 살인미수 사건'으로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 21만 명 이상 국민에게 강력한 처벌을 촉구한다는 동의를 받았다. 지난 7월 30대 남성이 여친과 말다툼 끝에 여친을 폭행해 며칠 후 숨지게 했다. 피해자 부모가 국민청원 게시판에 구속수사와 신상 공개를 촉구하자 42만 명이 응답했다. 많은 국민으로부터 공분을 산 '데이트 폭력' 사건이다.

데이트 폭력(dating abuse). 과거나 지금 연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 및 상해를 일컫는다. 우리 말 '치정(癡情-남녀 간의 사랑으로 생기는 온갖 어지러운 정)폭력'에 해당한다. 죽음이나 신체적 상해는 물론 몸짓이나 언어를 통한 정신적 압박과 위협 등을 포함한다. 가벼운 손찌검이나 물건 던지기부터 욕설, 구타, 폭행, 성폭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발생하기 일쑤다.

둘만의 문제로 돌려 그냥 넘어가는 일이 많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일종의 사랑싸움으로 치부해 폭력을 문제시하지 않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해자는 데이트 폭력 원인을 피해자 탓으로 돌려 폭력을 정당화하고, 피해자 역시 자신 탓으로 생각하고 폭력을 수긍하는 편이다.

데이트 폭력이 드러나 처벌로 이어지지 못하는 데는 사랑싸움 이전에 아주 교묘한 심리조작 때문이다. 가스라이팅이다. 권력 관계에서 지배적 위치에 있는 사람은 상황조작을 통해 상대방이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든다. 상대방은 정신적으로 황폐해지고, 권력 소유자는 상대방에게 지배력을 행사한다.

가스라이팅은 1938년 영국 '가스등-Gas light'이란 연극에서 비롯된 정신적 학대를 일컫는 심리학 용어다. 이 연극은 상속재산을 노리고 멀쩡한 아내를 정신질환자로 만드는 한 사나이의 탐욕을 그린 고전 심리 공포극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남편은 집안 가스등을 어둡게 조절하고 아내가 어둡다고 하면, 아니라고 아내에게 핀잔을 준다. 주변 환경과 소리까지도 조작해 아내가 현실감을 잃도록 한다. 아내는 모든 것을 남편에 의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은 어떤 짓(상속재산 몰수)을 저질러도 아내는 남편을 의심하지 않는다.

데이트 폭력은 권력 관계에서 우위를 점한 자가 상대방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물리적, 비물리적 행위다. 하지만 가스등 효과(gaslight effect) 때문에 상대방은 자신의 피해를 부지불식간 정당화한다. '맞아. 그 사람이 옳아, 내가 잘못이야. 이런 피해를 봐도 싸지'라고 말이다. 데이트 폭력은 수면 아래 지속하다 보면, 자칫 가학성(sadism)과 피학성(masochism)으로 굳어져 겉잡지 못하는 파국으로 몰고 간다.

최근 5년간(2016~2020) 전국에서 데이트 폭력 신고가 8만1천56건 접수됐다. 연도별로는 2016년 9천364건, 2017년 1만303건, 2018년 1만245건, 2019년 1만9천940건, 2020년 1만8천945건으로 대체로 증가세를 보였다. 살인, 성폭력, 폭행·상해, 체포·감금·협박 등 피해 수위가 높은 신고도 5년간 6만1천133건에 달했다. 이중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227명이 검거됐다. 한 해 평균 45명이 연인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잃을 위협을 당한 셈이다.

신고 건수는 해마다 늘지만, 검거 건수가 갈수록 감소함이 문제다. 지난 2016년 신고 건수 대비 검거율이 96%에서 2020년에는 52%로 크게 줄었다. 같은 기간 동안 데이트 폭력으로 형사입건된 4만7천755명 중 구속자는 4.2%(2천7명)에 불과하다(경찰청 국감 자료). 최근 SBS 조사 결과(18세 이상 천명 대상), 데이트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응답이 9%로 나타났다. 피해자 10명 가운데 8명이 신고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신고하지 않은 이유로 30% 정도 '처벌할 것까지 아니다'라고 말했다. '현행 처벌 수위가 너무 낮다.'고 답한 비율이 70%였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논설위원

많은 데이트 폭력이 자발이나 강요에 의한 합의로 법적 처벌로 이어지지 않는 점이 더 큰 화를 초래하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세우습의(細雨濕衣-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를 철저하게 망각하기 때문이다. 자칫 맞아 죽을지 모르면서도 가해자는 때리고 피해자는 맞는다는 말이다. 즉각적이고 철저한 대응만이 데이트 폭력방지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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