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백화점에 들어설 때 남자와 여자는 행동이 다르다고 한다. 남자는 처음에 눈길로 크게 빙 둘러보고 쇼핑을 빨리 끝내고 싶어 한다. 여자는 바로 쪼르르 달려가 물건을 고른다. 물건의 소재와 색깔, 냄새 등을 따지며 시간을 오래 쓴다.

남자의 그런 태도엔 들판을 누리며 동적으로 사냥하던 수렵 방식과 사냥한 고기를 빨리 집에 가져와 가족을 먹이던 심리가 녹아 있다고 크루거 박사는 말한다. 여자의 그런 태도는 가장 좋은 열매를 따고 못 먹는 풀을 가려내는 구석기 시대 여성의 채집 방식이 현대에 재현된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 인간의 몸은 부모에 의해 태어나 짧은 시간 살다가는 유한적 성격임에도 아득한 시절의 흔적 내지 집단 무의식이 배여 있어 그에 따른 행동이 나온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인의 몸엔 수렵 채취의 구석기 시대, 농경의 신석기 시대 때의 선험적 기억 역시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및 정보 사회를 사는 현대인들은 역사상의 어느 사회보다 스트레스가 많다고 볼 수도 있다. 정보 홍수, 처절한 생존 경쟁, 승자 독식주의, 각자도생에 따른 고독, 건조한 인간 관계, 관계에서 오는 고통, 정치적 아수라장, 환경 오염 등등에 기인한다. 그뿐 아니라 현대인들의 몸은 수렵과 채취, 농경 문화에 익숙한 생태로도 이루어져 있기에 겨우 200년, 몇 십년 정도 지난 자본주의 및 정보 혁명과의 충돌이 이면에서 부단히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일상의 풍경엔 이처럼 과거의 깊은 흔적들이 배어 있는데 술 문화에서도 이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술잔마다 골고루 술을 따라주는 것. 농경 문화의 산물이다. 농경 사회에선 굳이 서두를 것도 없고 술잔도 집집마다 넉넉하다. 농사를 짓다가도, 농사를 끝내고도 서로 따라 주며 우애를 돈독히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술 문화엔 술잔에 술을 따라주는 문화 말고도 술잔 돌리기 문화가 공존한다.

술잔 돌리기는 유목민족 문화이다. 적이 언제 말 타고 기습할지 몰라 유목민들은 물건들을 가급적 간소하게 할 필요가 있다. 말을 타고 다니기에 가급적 무게를 줄여야 한다. 술잔 하나 가지고 돌려 먹는 게 사람 숫자대로 술잔 놓고 세월아 네월아 음풍농월 하며 마시는 것보다 경제적이며 유익하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고래로부터 음주가무가 유명하며 술자리 빈도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나도 술을 즐겨 마시는 편인데 종종 허탈함을 느끼곤 한다. 경청의 미덕은 과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느낌이다. 사회에 스트레스가 많고 정보사회라서 할 이야기들이 많을 것이다. 상대의 말의 허리를 끊고 맥락도 없는 말을 대화 도중에 터억터억 뱉어내는 일이 다반사이다. 대화 속에 드러나는 이러한 빈혈기나 불소통의 흔적은 나로선 예전부터 느껴왔지만 요즘은 그 정도와 강도가 훨씬 더 세진 것 같다.

물론 그렇지 않은 모임들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술자리 문화만 보더라도 토론 문화, 담론 문화 모두 약하다. 이왕 술 마시는 거 일상의 잡다한 이야기들도 소중하지만 이처럼 술잔에 얽힌 농경 문화, 유목 문화를 비롯해 백화점에 들어설 때 남자와 여자의 행동 차이, 그 이면에 깃들어 있는 깊숙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등등 술 문화 담론의 파격도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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