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경영 수필가

어머니가 계시는 곳이 고향이고 봄이다. 엄마! 하고 달려가면 언제든지 오냐! 하고 반겨주시는 그 곳이 친정이다.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을 귓등으로 듣다 막상 그 일을 맞닥뜨리고 보면 알게 된다.'아하. 그 말이 바로 이 뜻 이었구나!'깨달았을 땐 이미 반백년 이상 세월을 보내고서야 겨우 철이 든 중노인이 된 것이다. 엄마가 딸에게 주는 인생 레시피가 누군가에겐 버려지는 고물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보물로 거듭 난다.

곱고 예뻤던 엄마는 허리가 굽고 오른 손을 마음껏 쓰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팔십 노인이 되었다. 손이 마르고 한쪽 어깨를 쓰지 못하며 지팡이를 의지 해야만 걸을 수 있다. 어린 아이들 유치원(幼稚園)에 보내는 젊은 엄마들이 노오란 미니버스를 기다리고, 그 옆에는 노치원(老稚園)버스를 기다리는 어르신들이 있다. 극진한 사랑과 지극정성으로 어머니를 보살펴 주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내게로 오셨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아침저녁 부축을 받아 올라탄 주간보호센터버스 출발하는 모습을 눈으로 봐야만 안심이 된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나를 길러주신 엄마를 이제는 내가 다시 보살펴 드려야하는 때가 온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 어른 되어 자기 자식 키우고 늙어 제 몸 추스르지 못하게 되면 자식이 어미 기저귀를 갈아주어야 하는 늙은 애기가 되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

어느 집이나 엄마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아이들을 다독이고 우애 있고 화목하게 지내도록 하는 집안 분위기는 엄마로부터 시작된다. 집 안의 해 '안해'가 바로 아내이고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결혼 연령이 늦어지고 있는 요즘에 비하면 어려도 한참 어린 신부는 부잣집 막내딸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촌부자는 일 부자라며 농사짓기 싫다고 가난한 도시총각에게 시집을 갔다. 엄마는 홀어머니에 시동생 둘까지 책임져야만 하는 고달픈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눈물 쏟아내던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았던 어렴풋한 기억이 내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 품에 끼고 지지고 볶고 살았던 그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돌이켜 보니 그 때가 인생의 전성기였다고 말씀하신다.

이경영 수필가<br>
이경영 수필가

어머니의 총기와 기억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부쩍 말이 많아진 엄마는 옛날이야기를 시작 하면 끝이 없다. 그 입에서 나오는 전설의 고향은 들어주는 사람만 있으면 밤을 새워도 부족하다. 엄마로 아내로 살아 온 세월 속에 눈물나게 가슴 아프고, 때론 너무 기뻤던 기억의 실타래를 계속 풀어내신다. 일부종사하며 사남매를 키운 젊은 날의 수고와 한숨은 돌아보면 눈물로 쓴 어머니의 일기장이다. 어머니의 다림질은 일상이었다. 가끔 우리 집에 오시면 옷장 문을 열어 와이셔츠부터 바지까지 오랜 시간을 다리미와 함께했다. 구겨진 주름이 쫙 펴지듯 이 옷 입고 일하는 사위 인생에 시온의 대로가 활짝 열리길 기도하셨다. 사회 생활하는 남자가 깔끔하고 단정하게 옷을 입고 밖에 나가야 그 아내의 얼굴이 빛나고 하는 일도 잘 풀린다는 지론이다. 친정엄마의 다림질 철학은 나의 딸들에게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인생은 강물처럼 흘러 어느새 팔십여 년이 훌쩍 지나갔다. 눈물고개 넘으며 고생한 기억은 저만치 가고 이제 자식만 남았다는 어머니. 허리띠 졸라매고 살아 온 엄마의 인생에 "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았어요. 그리고 참 잘 사셨어요." 어머니 살아 온 인생에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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