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오계자 소설가

말, 말, 말. 다 받아들일 수도 없다. 다 밀어낼 수도 없다. 말에 치여 어지럽다.

옛날과 달리 이젠 어수선한 마음쯤은 바깥바람 잠시 뒤집어쓰면 그만이다. 대문을 나섰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다르다. 청량한 달빛이 평화로워서 내 마음까지 닦아줄 것 같은 밤이다. 너무 어둡지도 않고, 너무 밝지도 않은 음력 9월 초열흘 밤, 살짝 배가 불러진 반달에 이끌려 걷다보니 희끄무레한 가을잔디가 덮여있는 동네어귀 못 둑이다. 물속에 잠긴 듯 수면에 떠 있는 듯 또 하나의 달이 벚나무 그림자 끄트머리서 거울 속의 자기 모습 보듯이 하늘의 달을 마주보고 있다.

밤이라도 불그레한 티를 내는 벚나무 이파리는 달빛에 멱 감고, 그 단풍 향에 젖은 나는 무릉도원의 신선을 연상한다. 잡동사니 말들이 거슬리어 대문을 나섰지만 바로 마음을 눅잦혀 준다. 실은 그이 보내고 별의 별 유언비어를 참 많이 들었다. 강산이 변한다는 십년을 두 번 보냈지만 도깨비 춤추는 말, 말은 여전하다. 한 송이 국화를 피우기 위한 우주의 움직임처럼 질곡의 세월을 견디고 예까지 오고 보니 비로소 알겠다. 변해야할 것은 내 마음이라는 걸. 소쩍새 울어대는 봄부터 천둥번개 다 견디고 이젠 거울 앞에 앉은 누님이 된 기분이다.

전에는 이런 분위기에서 살짝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어깨를 그렸는데, 이제는 나를 스치고 간 세월을 돌아본다. 저 물 속으로 스러져간 시간들과 함께 내가 쏟아 부은 기도와 한숨들이 숱하게 잠겨 있다. 세월이 나를 영글게 했는가, 삶이 내 가슴을 넓혀 놓았는가, 이제는 그 한숨과 눈물까지도 미소 지을 수 있는 추억이 된다.

강아지 한 마리가 집 앞에서부터 쫄랑쫄랑 따라와 까불거리더니 작은 돌멩이 하나가 굴러 물속으로 들어갔다. 삽시간에 달은 조각나고 벚나무 그림자도 허리와 목이 부러지고 모든 것이 일그러져 버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좀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잠자던 물고기들이 깨어나서 여기저기 수면에 점을 찍어댄다. 눈앞에 일그러진 형상들이 다사다난 했던 지난 날 내 기억속의 동영상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영화처럼 필름을 돌린다.

오계자 수필가
오계자 수필가

십여 년 전, 그날도 그랬다. 환갑 진갑 다 넘긴 이 할미가 주변의 허설에 더는 견디기 힘들어 전깃줄에 앉은 참새처럼 이리 날아갈까 저리 날아갈까 선택을 하려는 마음이었지. 그날도 겨우 달빛에 마음을 씻으려고 애쓰면서 던진 돌멩이가 오늘처럼 수면의 그림들을 망친 것이다. 마음도 뒤죽박죽이었지. 바로 그때 휴대폰 울림이 나를 흔들었다. 아들이었다. "엄마 허리는 좀 어떠세요?" 그 한. 마디는 우리 집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나를 걱정하는 아들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닦지 않고 그냥 줄줄 흐르게 두었다. 내가 어리석게도 나를 진정으로 걱정하고 필요로 하는 자식들보다 주변의 허설에 기울어져 잠시 엉뚱한 생각으로 전깃줄에 앉은 참새모양이 된 것이구나. 뭣이 중한지도 모르고 흔들린 자신이 새삼 작게 느껴졌고 반성했다. 이제는 세상이 아무리 나를 흔들어도 내 자식들이 보호해 주는 나만의 세상에서 절대 흔들리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그 날 후, 아팠던 기억도 미소를 불러오는 추억으로 엮는다. 하늘을 보니 달의 미소에 그이의 얼굴이 포개어져 나타난다. 평화롭고 온화하다. 생전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무슨 뜻일까. 이제는 평화롭게 거울 앞에 앉은 시인의 누님 같은 내 기분을 눈치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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