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옥 수필가

주말 아침이다. 출근하지 않는 아침이니 평소와 다르게 느긋하게 일어나 주방으로 간다. 오늘 아침 메뉴는 무엇으로 할까? 걱정은 없다. 남편이 어제 밭에서 따다 놓은 호박이며 가지가 날 기다리고 있고, 베란다에는 하지 무렵에 수확해놓은 감자도 한 상자 자리 잡고 있고, 매운 청양고추며 풋고추 또한 냉장고에 가득 들어있다.

호박을 구워 양념장을 얹어 먹을까, 새우젓 넣고 하얗게 볶아먹을까? 가지도 살짝 쪄서 무칠까, 양파를 넣고 볶을까, 감자도 채쳐 볶을까, 간장을 넣고 조릴까, 고추장을 좀 넣고 납작감자볶음을 할까, 순간, 다양한 방법의 요리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나름, 고민을 잠시 해 본다. 남편이 텃밭을 가꾸고부터 시작된 고민이다.

몇 년 전 남편이 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평소 알고 지내는 선배가 남는 터에 뭔가를 심어보라며 몇 평씩의 땅을 지인들에게 빌려주었다.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붙은 팻말이 서고 남편의 이름도 한 몫을 차지했다. 두어 고랑쯤 되는 밭이다. 남편이 텃밭을 갖게 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팻말 앞에 베고니아꽃을 줄지어 심는 일이었다. 꽃밭과 밭의 경계, 베고니아.

어릴 적엔 집집마다 조그마하게나마 텃밭이 있었다. 텃밭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작은 꽃밭들도 늘 함께했었다. 집이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윤택하면 윤택한 대로 집집마다 꽃밭이 있었다. 돌담과 울타리 아래에서 해맑게 피어나던 키 작은 채송화는 기본이고, 봉선화 백일홍, 저녁답이면 꽃봉오리를 열었던 분꽃들 역시 누구네 집에나 다 피어있었던 꽃들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도 텃밭이 있었고 꽃밭이 있었다. 텃밭과 마당의 경계는 하얗게 꽃을 피우는 부추꽃이었다. 텃밭엔 옥수수며 고추가 자랐던 것 같고 마당이 있고 꽃밭이 있었다. 마당에서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하다가 싫증이 나면 부추꽃을 따다가 소꿉놀이를 하기도 했다.

텃밭이라는 생존의 공간, 소박하게나마 삶을 관조할 수 있었던 꽃밭이라는 여유의 공간, 뛰어놀 수 있었던 마당이라는 놀이의 공간, 가난했지만 삶의 공간 안에 마당을 들이고 꽃을 심는 여유가 그때는 있었던 게 아닐까.

처음 풋고추를 따오고 상추를 따오고 시간이 좀 지나자 남편은 둥글고 이쁜 애호박도 따오기 시작했다. 노지에서 햇빛과 바람과 비를 맞으며, 남편의 사랑까지 듬뿍 받고 자란 호박은 그 맛이 달디달았으며 고추의 향을 그대로 지닌 풋고추, 상추 꼭지의 하얀 진은 싱싱하고 건강했다. 이웃과의 나눔 또한 즐거웠다.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 남편은 수시로 밭으로 달려갔고 거름을 주고 돌들을 걸러내고 흙을 매만져주었다 한다. 밭의 곡식과 채소들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남편은 은근 다른 밭의 작물들과 비교를 한다. 자기의 농사 실력이 제일 낫다나 어쨌다나…. 하긴 그러고 보니 남편 텃밭의 붉은 고추들이 훨씬 실하고 선명한 것 같기도 하다.

김영옥 수필가
김영옥 수필가

베고니아꽃으로 경계를 만들 줄 아는 그대여, 그대의 베고니아 텃밭 덕으로 건강한 먹거리와 가난했지만 유복했던 어린 시절 추억을 소환할 수 있어 행복했네. 우리들 마음속의 경계들이 이렇게 꽃길로 이어진다면 우리 자식들은 어떤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기억할까.

현실에서의 부대낌, 고달픔을 남편은 땅을 매만지고 고추, 호박 모종을 심고 가꾸며 그 시름을 달래었으리라. 가을의 끝자락, 지금 그 밭에 튼실한 무가 숨을 고르고 있고 시퍼런 배추들이 굵고 짧은 뿌리를 굳건히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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