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날까지 망치 드는게 꿈… 창조의 기쁨과 희열"

정봉기 작가
정봉기 작가

[중부매일 정구철 기자] 사람들은 어릴적 갖고 있던 꿈을 포기한 채 평생 마음 속으로만 간직한 채 사는 경우가 많다.

녹록치 않은 주변 여건과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당장 입에 풀칠을 하면서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오로지 자신의 꿈을 위해 어려운 환경을 딛고 치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조각가 정봉기(54) 씨는 스스로에 대한 끝없는 도전을 통해 어릴적 꿨던 꿈을 현실로 만든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얼굴에는 누구에게서도 쉽게 찾기 힘든 행복한 표정이 숨어있다.

정봉기 작가는 어릴적부터 조각가가 되겠다는 꿈을 꿨다.

어린시절 찰흙이나 비누를 조각해 자신이 원하는 형상을 완성해가면서 희열을 느꼈다.

그는 목원대학교 미술교육과에 입학해 조소를 전공, 비로소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막연했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시작했다.

1994년 대학을 졸업하고 조각부문 대가인 유영교, 김동우 작가의 제자로 들어가 있던 중 IMF 한파로 인해 예술계 전반이 극심한 침체를 겪게 되면서 고향인 충주로 내려오게 됐다.

당장 생활고 해결이 급선무였던 그는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 대학원을 다녔다.

이후 자신의 작품활동보다는 미술학원 운영에 주력해야 했던 그는 3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오랜 고민 끝에 2003년 미술학원을 처분한 5천만원으로 아내와 10살과 5살된 어린 두 딸까지 데리고 이태리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정 작가는 "당시 이태리어라고는 이태리에 있는 도시 이름밖에 몰랐던 내게 유학 결정은 의욕과 열정만 앞세운 무모한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유학했던 이태리 까라라 지역은 대리석의 산지여서 르네상스 조각의 산실로 통하는 곳이다.

정 작가는 조각부문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까라라 국립미술아카데미를 다녔다.

바디랭귀지로 겨우 소통하면서 서구 유럽의 돌조각을 이해하고 배우는데 모든 열정을 쏟았다.

하지만 그는 불과 1년만에 가져간 돈이 모두 떨어져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빈털터리 신세가 됐다.

다시 한 번 이상과 현실을 놓고 기로에 서게 됐지만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정봉기 작가
정봉기 작가

그는 유학생활 1년 동안 완성한 작품 20여 점을 들고 혼자 귀국해 고향인 충주 롯데마트 전시실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회를 열었지만 처음에는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5일째 되던 날 생면부지의 사람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전시회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고 이튿날 직접 전시장으로 찾아와 작품 다섯 점을 구입해 갔다.

그의 작품을 구입한 사람은 일산에 사는 양천구·조문순 씨로 이들은 기업을 운영하면서 형편이 어려운 작가들을 후원하는 미술 독지가다.

정 작가는 "당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있던 내게 두 부부는 구세주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이후 이 소문이 나면서 불과 며칠만에 나머지 작품들이 모두 팔렸다.

그는 작품 판매로 마련한 돈을 들고 다시 이태리로 날아가 작품활동에 몰입할 수 있었다.

유학 3년째 되던 해부터는 이태리 현지에서 그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그의 작품을 원하는 컬렉터들이 나타나게 되고 화랑에서 초대전 의뢰도 들어왔으며 미술관에서 전시도 하게 됐다.

하지만 외국생활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으로 결국 5년만인 2008년에 유학을 접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귀국 후 충주시 대소원면 만정리 지금의 성마루미술관 뒤에 있는 허름한 창고를 빌려 방을 꾸미고 4가족이 함께 살았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작품활동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2011년에는 대출까지 받아 수안보면 관동길 74-1에 작은 땅을 사고 현재의 집과 작업실을 지었다.

수안보중학교를 지나 좁고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맨 위 끝에 있는 건물이 정봉기 작가의 집과 작업실이다.

사시사철 새소리를 들으면서 좋은 공기를 마실 수 있고 계곡물이 바로 옆으로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다.

여기에는 그의 작품 100여 점이 소장돼 있는 자그마한 전시실과 카페까지 갖추고 있다.

그의 두 딸은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미술을 전공했다.

큰딸 다희(28) 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2년 동안 청주에 있는 공장에 다니면서 스스로 유학자금을 마련한 뒤 이태리로 건너가 현재 밀라노에서 신발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작은 딸 주(24) 씨는 산업미술을 전공하는 대학교 4학년생이다.

정 작가는 왕성한 작품활동으로 지금까지 개인전을 열아홉 번이나 열었고 단체전은 200여 회나 참여했다.

이 가운데 다섯 번의 개인전은 이태리에서 가졌다.

그는 돌과의 교감을 통해 혼을 불어넣고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데 집중한다.

정 작가는 "내 작품은 돌이 갖고있는 특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작가의 의도를 가미해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키는 게 특징"이라며 "특히 이성적인 면보다는 감성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 집중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여인상으로 사랑스러움과 순수함 등 다양한 감정이 작품 속에 담겨 있다.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모든 열정과 혼을 쏟아 집중하기 때문에 크게 예민해진다.

특히 돌조각의 특성상 무거운 돌을 나르고 자르는 작업을 하다 보니 체력적으로도 보통 힘든 게 아니다.

하지만 땀의 대가로 작품을 완성하는 순간, 한없는 희열과 함께 표현하기 힘든 카타르시스까지 느낄 수 있다.

이 때문에 작업에 몰두하는 동안이 그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정 작가는 지난 1일부터 7일까지 충주시청 광장에서 야외 조각전을 가졌다.

야외 조각전은 시간과 금전적인 부담으로 작가들이 거의 엄두도 못내지만 그는 지게차와 대형화물차까지 동원해 가며 이번 전시를 강행, 총 12점의 대형작품을 전시해 큰 호응을 얻었다.

정 작가는 시각예술 전반에 대한 쓴 소리는 물론, 특히 지역 미술계 침체에 대해서도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지역에서 이뤄지는 공모전이 대부분 전국 공모로 추진되다 보니 경쟁력이 약한 지역의 예술가들은 거의 외면당하고 몇 안되는 중앙의 작가들에게 혜택이 편중되는 경향이 있다"며 "이는 빈익빈 부익부를 부추기는 결과"라고 말했다.

또 "주최 측은 공정성을 꾀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대형마트와 소규모 재래시장의 경쟁이나 마찬가지여서 오히려 불공정 경쟁으로 봐야한다"며 지역 예술인들의 지원을 위해 자치단체나 지방의회에서 제도적인 뒷받침에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내년에 서울에서 개인전을 계획하고 있는 그는 최근에도 작품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정봉기 작가는 "조각가는 죽을 때 망치를 손에 들고 죽는 것이 가장 행복"이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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