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에 얽힌 사연
독립기념관에 얽힌 사연
  • 중부매일
  • 승인 2021.11.29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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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최병부 ㈔한국문인협회 서산지부 부지부장

지금으로부터 39년 전인 1982년 7월, 주일(駐日) 특파원에 의해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사실이 전파되자 전국이 반일운동으로 확산 됐다. 분개한 국민들은 거리로 나와 궐기대회를 하는 등 일본을 규탄했고 우리 정부에서는 일본 정부에 엄중 항의했다.

한편 전국에서는 광복된 조국에 독립기념관이 없으니 독립기념관을 건립하자는 의견을 내놓게 됐다. 9월이 되자 일본 역사 왜곡사건으로 불거진 독립기념관 건립이 전국적으로 확산 됐고 성금이 쇄도하고 있었다.

독립기념관 건립 여론이 가시화되자 당시 천원군수님은 독립기념관은 역사적 배경으로 보아 충절의 고장이자 의인(義人) 열사가 많이 나온 천원군에 유치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리하여 독립기념관 후보지로는 수신면 장산리 일대, 목천면 흑성산 밑 남화리 일대, 병천면 용두리 일대, 성환읍 국립종축장 일대가 일차적으로 선정됐다.

대체적인 의견은 면적이 백만 평 이상은 되어야 하고 뒤에 산이 있는 남향이어야 하며, 멀리까지 아래로 조망할 수 있는 좌청룡 우백호(左靑龍 右白虎) 형태가 확실하고 보상할 물건이 비교적 적은 곳이어야 했다.

하루는 식산과장께서 "최기사는 오늘 나와 같이 목천과 병천으로 출장 가서 조사할게 있다."고 하시면서 나를 앞장세우셨다. 영문도 모르고 과장님을 따라나선 나에게 목천면 신계리서부터 병천년 가전리까지 안내도를 그리며 역사적 배경을 기록토록 했다.

흑성산(黑城山)은 높이 519m로 풍수지리상 서울의 외청룡이 된다고 하며 본래 이름은 검은 성(儉隱城)이었다. 이 검은성을 중심으로 조선왕조이래 진주성 싸움의 김시민 장군, 상해 임시정부주석이었던 이동녕 선생, 이범석 장군, 유관순 열사, 조병옥 박사 등이 이곳에서 출생했고 암행어사 박문수의 성장지이기도 했다.

독립기념관이 이곳에 세워진 것도 이런 역사와 결코 무관치를 않았으며, 그후에 알고 보니 그날 현장 조사가 독립기념관 후보지 물색 기초자료였었다.

정부에서는 그 후 숱한 현장답사와 심사숙고 끝에 드디어 흑성산 아래 목천면 신계리, 남화리 일대를 독립기념관 후보지로 결정했다. 그때가 1982년 11월 25일이었다.

그 후 세월은 흘러 독립기념관이 거의 완성되어 개관을 몇 일 앞둔 1986년 8월 4일 주(主) 건물인 본관이 화재로 소실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만든 건물인가! 전국민의 피땀 어린 정성이 모아져 만든 독립기념관이 불타버린 것이다.

화재가 나자 독립기념관에 대한 전반적인 감사원 감사가 실시됐다. 하루는 독립기념관에 파견 나온 감사관이 독립기념관으로 갑자기 들어오라는 호출 명령이 떨어졌다.

독립기념관 건립지역 이주 농가였던 모농장의 보상금 지급 신청 내역서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당시 함께 동행했던 충남도청 축산과 사료계장께서 나를 대변해 주셨다. 그 당시 서슬이 퍼렇던 감사원 측에서도 아무런 혐의점을 찾지 못하자 나를 돌려보냈다.

최병부 ㈔한국문인협회 서산지부 부지부장
최병부 ㈔한국문인협회 서산지부 부지부장

그래서 나는 공무원은 정직하게 살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무원은 오직 명예를 먹고 사는 것이다. 명예 하나면 족하고, 절대로 두 가지를 가져서는 않된다. 이것 이상은 생각지도 말고 쳐다보지도 말자.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다. 세월이 지나면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왔다가 한세상을 분주히 살다가 자신도 모르게 알 수 없는 세계로 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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