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오계자 소설가

맑은 물이 흐르는 옛 빨래터를 지나 창덕궁 담을 따라 걷는 길을 좋아한다. 궁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라 맑아서 부근 주민들 뿐 아니라 할머니는 궁에서도 나와서 빨래를 했다고 한다. 정우는 어머니에게 궁중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이야기부터 역사시간에 듣지 못했던 이야기까지 대궐 내부의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어머니도 할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라고 하셨다. 증조할머니께서 어릴 적에 부뚜막에서 나물을 무치면서도 늘 입버릇처럼 임금님 밥반찬을 해드리고 싶다고 하시더니 결국 궁으로 들어가셔서 임금님 수라상을 맡으셨다고 했다. 음식 솜씨가 좋으시다는 소문 때문에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가 수라간 나인으로 일 하시다가 수라간 상궁이 되셨다고 했다. 원래는 관청이나 왕실의 여종 중에서 10세 전후의 여아들을 10년 에 한 번씩 선발해서 20세 전후에 계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는데 증조할머니는 평민인데 뽑혀서 궁에 들어가 열여섯에 계례를 치르고 수라간 일을 하셨다는 것이 큰 자랑거리였다. 종이 아닌데 강제로 잡혀간 것이 자랑이니 정우에게는 웃음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자랑하시는 이유가 두 가지다. 하나는 뛰어난 음식 솜씨요 또 하나는 궁중역사상 최연소 상궁이 되신 것이다.

"상궁은 왕의 여인이라 해서 결혼도 못하고 요즘 용어로 종신직인데 어떻게 할아버지를 낳으시고 집을 사고 땅을 샀어요?"

할머니께서 장만하신 집과 땅은 눈곱만큼이라도 줄일 수 없으며 팔지 않는다는 것이 가훈이 되어있으니 손자들이 자라니까 설명이 필요하다. 정우도 어떻게 마련한 자금으로 집을 짓고 땅을 샀을까 늘 궁금했다. 아버지 말씀은 "할머니께서 얼마나 알뜰하신지 궁에서 품으로 받은 곡물은 한 톨도 축내지 않고 몽땅 장리쌀로 풀었다가 가을에 거둬들이는 이익을 챙기셨단다. 그런 모든 관리는 집안 동생뻘 되는 유집사가 했고 퇴궐 후에는 그 유집사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으니 정우 너에겐 친 할아버지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궁궐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지만 그냥 재미로만 듣던 이야기들이 현실 사회와 비교해보면 놀라운 일들이 많다. 4.19와 5.16을 겪은 것도 제대로 사람답게 살고 싶은 국민의 염원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직공들이 사람대접은커녕 너무나도 홀대하니까 노동자들이 듣도 보도 못하던 집단데모라는 것을 하는 세상인데 오히려 조선시대 궁녀들이 지금의 공무원들보다 훨씬 근무 대우가 인권주의였다. 8시간 근무가 철저했고 그것조차 격일 근무라고 기록 되어있다. 급여는 물론 곡물로 받고 명절이나 왕실 잔치 등이 있을 때는 특별 상여금도 있다. 사유재산이 허락 되어 있기 때문에 노후를 위해 궐 밖에 집이든 땅이든 얼마든지 마련해둔다고 했다.

"할머니는 지금의 원서동에 아담하지만 탄탄하게 기와집을 짓고 땅도 많이 사셨는데 왜정 때도 상궁의 집이라고 궁에서 특별요구로 건들지 않았어." 아버지는 자랑거리가 많다. 예순 다섯에 엉치뼈(아마 고관절이 아닐까)가 고장 나서 궐에서 나와 열 살짜리 유집사 아들을 양자로 삼으셨다고 했다. 우리 할머니께서는 참 운이 좋으신 분이다. 할머니께서 궐에서 나오신 다음해에 한일합방이 되었으니 말이다.

원서동에서 창덕궁 담을 끼고 걷는 것을 좋아하는 정우는 자연스럽게 궁녀들의 삶을 상상하기도 하고 내시들의 삶을 생각할 때도 있다. 단지 생각하면서 걷기 좋아 이 길을 걷는다. 서울대 합격 소문은 어찌나 빨리 번지는지 합격을 알게 된 건 며칠 되었지만 통지서는 오늘 받았다. 벌써 내로라하는 부잣집들은 개인 과외 의뢰가 네 번째다. 생각해 보겠다고 같은 대답으로 미루고 있지만 가회동 사모님의 말이 제일 무게 있게 남는다. 대부분 학교에서 주소 파악하고 기사를 보내서 보자고 하는데 가회동 사모님은 직접 오셨다.

"정우학생, 내가 아들만 둘인데 큰아이는 포기 했고 우리 현우를 꼭 학생에게 맡기고 싶어,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기울어지네, 인연 인가봐. 어쨌든 우리 현우 좀 부탁합시다. 학생 부탁해요, 안 하드라도 동생이라 생각하고 오늘 한번 만나 봐줘요."

엄마가 끓여 온 차를 마시면서 사모님은 "학생도 학생이지만 모친과 댁의 분위기가 품위 있는 클레식 집안입니다. 놀라워요, 이런 가정에서 자란 학생이라면 정말 내 자식 믿고 맡기고 싶어요." 말로만이 아니라 참 진지하셨다.

"저녁에 가족이 모이면 상의 해보고 내일 댁으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사모님 댁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하면서 메모지와 만년필을 꺼내 메모를 했다.

오계자 수필가
오계자 수필가

생각 좀 하려고 일찌감치 나서서 걷는 중이다. 궁에서 흘러나오는 엣 빨래터 길을 지나면서 오늘 만은 할머니 생각도 궁중 생활의 상상도 아닌 가회동 중학생 현우 생각이다. 거의 고1 후배들의 부탁인데 중2를 맡으면 부담이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성적 외에 무언가를 기대하고 싶은 것 같다. 대부분 엄마들이 성적만 올려주면 뭐도 해주고 뭐도 해준다고 하는데 성적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이 엄마는 아는 것이다. 그래서 관심을 갖는다. 동생들에게 건전한 마인드를 심어서 그 바이러스가 우리 사는 세상 구석구석 번지면 좋겠다. 중학교 때 친구 잘못 만나 비뚤어진 준희를 바른길로 잡아주고 싶어 했을 때 나와 내가 시소를 탔다. 어느 길이 바른 길이냐고 반문하는 나, 대다수가 걷고 있는 그길? 남의 이목 신경쓸 필요 없어 너는 너야 하는 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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