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옥 수필가

차고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 코끝이 싸하고 장갑 끼지 않은 손끝이 시리긴 하지만 마음은 상쾌하다. 하늘까지도 파랗게 개여있다. 간밤에 내린 비가 추위를 데리고 오긴 했지만 미세먼지들을 멀리 쫓아내 버려 푸르게 맑은 겨울 하늘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맑은 하늘 속에 등불처럼 남아있는 홍시 몇 개를 바라본다.

장편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자신의 조국 다음으로 한국을 사랑한다고 했던 미국인 펄 벅 여사는 그의 저서 '살아있는 갈대'에서 "한국은 고상한 민족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이다"고 극찬했다. 바로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겨울 하늘의 주황색 감 때문이다. 감이나 대추를 따더라도 겨울새들을 위해 몇 개를 남겨두는 그 고상한 마음이 바로 우리 민족인 것이다. 우리 옛 어른들은 봄철에 씨앗을 뿌릴 때도 세 개의 씨앗을 뿌린다 했다. 하나는 하늘을 나는 새들을 위하여, 하나는 땅속의 벌레들을 위하여, 마지막 하나는 내가 먹는다는 그 나눔의 마음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저력일 터이다.

달랑 한 장밖에 남아있지 않은 달력을 보니 또 마음이 조급해진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편치만은 않다.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거의 2년째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어떤 장소에 가더라도 한 자리씩 건너 앉기가 일상화되어 있다. 이렇게 건너 앉기가 다른 사람에 대한 무관심을 공공연하게 인정하고 있는 셈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이렇게 타인에 대한,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착잡하다.

어쩌다 고속도로나 들길을 달리다 보면 추수가 끝난 들판에 하얀 원통형 비닐 뭉치들이 여기 저기 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체 저것의 용도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언제부터인가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서 볏단이나 볏짚이 그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 자리에 정체불명의 원통형 비닐 덩어리들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건 바로, 볏집을 싹쓸이해서 기계로 둘둘 말아 소의 사료로 팔아넘기기 위해 곤포(梱包)덩어리를 만들어 놓은 것들이었다. 쪼아먹을 나락 한 점 남아있지 않은 논에 새들이 날아올 리 없고 새 한 마리 날아들지 않는 겨울 들판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밀레의 그림,' 이삭 줍는 여인들' 이란 명화 속의 모습은 이제 먼 세상 속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가난했지만 이웃을 배려하며 한낱, 미물들의 생명까지도 생각할 줄 아는 여유는 이제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

이제 곧 구세군의 냄비가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바쁘다는 이유로 종종걸음치며 구세군의 종소리를 외면하며 그 자리를 바삐 떠났던 부끄러운 내 모습이 오버랩 된다.

김영옥 수필가
김영옥 수필가

'고향이 고향인 줄도 모르면서/ 긴 장대 휘둘러 까치밥 따는// 서울 조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남도의 빈 겨울 하늘만 남으면/ 우리 마음 얼마나 허전할까// 살아온 이 세상 어느 물굽이/ 소용돌이치고 휩쓸려 배 주릴 때도// 공중을 오가는 날짐승에게 길을 내어주는/ 그것은 따뜻한 등불이었으니// 철없는 조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중략)' 송수권 시인의 시 '까치밥'이다

더없이 각박해진 세상 인심에 대한 신랄한 일갈이다. "서울 조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차가운 송수권 시인의 '까치밥'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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